바르트

[스크랩] 최근 신학 -김 동건 교수-

싸이촌 2008. 12. 1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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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학  -김 동건 교수- 

                                                                                            3. 16.

말씀에 대한 인식 가능성, 인간의 책임성 문제, 인간론과 같은 것을 오늘 다루고자 한다.

지난 학기에 다룬 바르트의 사상의 특징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말씀이 주체가 된다. 인간이 말씀을 객체로 보고 이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는 존재의 유비에 속한 것이기에 결국 이것은 인간의 투사에 불가한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이원화된 사고가 생겨났다. 객체와 주체의 도식 속에서 하나님은 객체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gap은 점점 커져갔고, gap을 메우려는 시도로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시도가 있었다. 두 시도는 서로 상반된 것으로 보이나 실은 출발점이 모두 인간에게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데 바르트는 경건주의, 합리주의 모두를 거부했다. 바르트는 자신의 입장을 아주 정밀하게 개진했는데, 이로 인해 정통주의가 초토화되고 자유주의가 득세하던 때에 신정통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바르트의 입장은 일방적으로 보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가 대두되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 인간은 선교든 무엇이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계통의 문제제기가 많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르트가 말하는 이 신앙 속에는 하나의 선포는 있지만 내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계시로써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을 채울 수 없다는 비판도 있었다. 바르트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바르트에 대하여 이 정도만 이해한다. 이것이 바르트의 이해에 있어 한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한계를 넘어선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하여 답변한다. 지난 학기까지는 바르트의 특징에 대하여만 다루었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하여 충분히 답변하지 못했다. 이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겠다. 하나님의 계시의 일방성과 말씀의 일방성이라면 말씀의 인식가능성은 인간에겐 없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책임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루도록 하겠다.


3. 말씀의 인식 가능성

1) 말씀(계시)의 인식가능성(CD 1/1 p189-247)

바르트는 위 책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말씀인식에 대한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그는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제기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그는 먼저 이런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의 사고가 명석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르트는 인식의 대상에 따라서 즉 무엇을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접근하는 인식 방법론과 그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식대상에 관계없이 동일한 방법론을 구별없이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 이 말이 의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식의 방법론을 말씀과 계시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계시, 말씀을 인식의 목적, 대상으로 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은 없다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인간이 천문학이나 다른 무엇을 인식했다고 해서 이것을 동일하게 계시, 말씀에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 경험이 결국 토대가 될 수밖에 없는 방법론, 크게 두 가지 주관주의와 실존주의적 입장에 분명한 반대를 표명한다. 이 둘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이나 경험에 의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2) 왜 이것이 가능하지 않는가? 말씀, 계시가 인간 인식으로 도달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무, 사람, 시계 물 등은 우리에게 인식되어지는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말씀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가 말씀을 인식하고, 말씀이 우리에게 인식당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착각이다. 말씀은 우리에게 인식당하는 인식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 주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말씀이 주체로써 인간에게 너는 ‘이것을 하여라’고 정언적 명령을 하거나 회개를 촉구하시지, 인간에게 객체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인 말씀을 객체화 시켜서 다른 사물과 동일하게 인간 인식의 대상화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우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합리주의 시도는 우상주의적 사고에서 나왔다고 바르트는 비판했다.


(3) 계몽주의 이후로 자연과학은 객관성을 학문화하여 발전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산물인 모든 것을 객체로 다루는 방법을 말씀에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바르트는 서구신학의 숙제였던 주객도식 자체를 타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가? 바르트는 가능은 하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다시한번 주관주의적, 실존주의적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러한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둘의 출발점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깨닫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말씀 자체가 가지는 능력에 의해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인식하는 가능성 자체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게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인식의 주체는 말씀, 계시 자체이다.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은 우리에게 이해되는 객체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고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는 순간에는 말씀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객체이자 동시에 주체인 것이다.


(4)신학화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말씀이 가지는 자체적인 능력에 의존한다면,, 인간은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그것을 창출할 수도 없다면 이것은 역사의 현실, 선교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역할이 너무 취약한 것이 아닌가? 바르트는 여기에 대하여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바르트는 굉장히 칼빈적이고, 루터적이고 바울적으로 답변한다. 인간이 선교적 전략으로 선교를 할 때, 선교가 인간의 능력에 제한당한다고 하면 이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 자체의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불가능해보일지라도 인간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결과는 성령께 달렸지, 인간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이 사상은 ‘하나님의 선교’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말씀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말씀이 객체로 나의 입을 통과해서 던져지는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다음 그 말씀을 듣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지 어떨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나의 입을 통하여 말씀이 던져지는 순간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인식되어지고, 응답되어지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바르트식의 사고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은 없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굉장히 강력한 선교 신학적 동인이 주어진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의 한계 속에 가두었던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한계, 사고, 능력 속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에 주체이며 객체라는 사고가 선교의 현장에서 인간의 책임성이 약화될 것이라는 것은 바르트가 동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역량에 의존했을 때 우리는 좌절하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역사에 달려있다면 오히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다. 정말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도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 현장이 어떠하든지 말이다. 열매는 성령이 거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신(말씀) 인식의 객관성과 한계 (CD 2/1 p1-225)

우리가 이렇게 계시를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바르트는 객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르트는 주관주의와 실존주의와 같이 자기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체험에 종속시키기 때문에 거부했다. 바르트는 이렇게 인식한 하나님의 말씀이 객관성도 가지고 있고, 한계도 가지고 있다라고 보았다.


(1) 말씀, 계시의 인식에 있어서 신은 자신이 주체인 동시에 객체(대상)이 된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를 생각해 보자. 이 때 성서는 우리에게 대상으로 읽히어지지만 어느 순간 성령의 함께하심으로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에게 놀라운 말씀, 은혜의 말씀, 회개케하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객체가 어느 순간 주체로서의 말씀 자체가 가지는 능력에 의해서 말씀은 말씀이 되는 것이다. text로서의 말씀이든 선포로서의 말씀이든 동일하다. 듣는 순간까지 말씀은 대상이 된다. 우리는 듣는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이 되는 순간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이 가지는 능력 때문이다. 말씀은 인식의 대상이면서 주체인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존재로서 스스로에게 객관적이다’바르트가 표현했다. 이것은 말씀이 객관적이지 인간의 주관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계시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적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면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일차적 객관성이라고 표현했다. 바르트는 이 일차적 객관성에 대해서 인간은 논할 수 없고, 논할 필요도 없다라고 생각했다.


(2) 하지만 신은 자기계시라는 1차적 객관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피조세계에도 계시하신다. 신은 항상 피조대상을 선택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 근거와 증거는 구약과 신약에 아주 많이 있다.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시고, 스스로를 ‘나는 누구니라’드러내셨다. 이렇게 해서 예로 모세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만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씀, 계시는 모세와 아브라함이 인식한 그 사람의 주관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인식은 여전히 객관적이다. 물론 일차적 객관성에 반해서 이것은 간접성을 가지는 객관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이것을 ‘이차적 객관성’이라 표현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피조물이 신의 말씀을 인식한 이 인식을 왜 객관성이라 말해야 하는가? 굉장히 많은 하나님의 사건들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신 사건이었다. 예로 창조, 출애굽, 성육신, 십자가, 예수의 많은 선포.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신, 구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어떻게 스스로를 알렸는지를 보여준 역사이다. 즉 피조세계는, 역사는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왜 바르트는 객관성이라 말했는가? 어떤 것은 마태에 의해서, 다양한 성서 기록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임에도 객관성이라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어떠한 주관적 결단이나 주관성이 인식의 결과를 변경시킬 수 없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능력에 따라서 그에게 계시되어진 인식의 결과가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건(출애굽, 성육신, 부활 등)을 겪었던 성서 기자들은 소수이고 다양했지만, 그들은 단지 보여주시는 만큼만 인식할 수 있었고, 그들은 인식한 결과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러기에 계시의 사건이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의 계시 사건은 여전히 우리가 자의적으로 주관화할 수 없다. 매우 주관적 해석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이는 성서의 계시사건 조차 인간의 주관성에 완전히 던져진 것이 아니기에, 인간의 인식, 행위에 따라 인식의 결과가 달라질 수 없기에 2차적 객관성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는 말씀의 인식이나, 계시의 사건은 객관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으며, 2차적 객관성은 어디까지나 1차적 객관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말씀의 객관성에 대한 이런 논의들은 자유주의적 해석학이나 주관주의적, 실존주의적 신학의 흐름을 뒤엎는 것이다. 바르트는 실제로 논쟁을 벌여 이겼다.


(3) 신인식의 주체이면서 객체이신 하나님은 객관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는 분이시다. 신비라는 용어를 통해 신인식에 있어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 계시를 아는 것은 그가 알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득도, 기도)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지만 자신을 낮추어서 시간 안으로 들어와서 스스로를 알려주셨다. 그것이 계시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구체적인 작용은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알리는 신비 안에서만 우리는 그를 인식할 수 있다. 왜 신비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끝내 어떤 신비 속에서 우리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 드러나 있지 않다. 1차적 객관성에 해당되는 부분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다만 2차적(간접적) 객관성, 즉 하나님이 피조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만큼만 안다. 우리는 이것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이것은 우리가 시도하여도 허락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라 했다. 그는 이것을 ‘신비’로 남겨두었다. 이것, 즉 신비는 명확성과 충돌되는 모순개념이 아니다.


(4) 정리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지식이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가 존재의 유비는 거부하지만 신앙의 유비로 하나님과 인간의 독특한 관계성을 설명한 것은 이것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오직 신앙의 인식, 신앙적 지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비다. 신비롭다고 하여 명확하지 않다고 두려워말라. 신앙 안에서 너무나 신비롭게, 그러나 너무나 명확히 주어진다. 결코 모호하지 않다. 신비라는 말은 모호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전달되고 인식되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기에 신앙적 확고함, 명확함이라는 것은 과학적 개념의 명확성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자가 나왔던 것은 과학적 명확성 때문이 아니었다. 과학의 명확성의 기준에 의해 성서는 판단될 수 없다. 그 기준으로 신앙이 모호하니 어쩌니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인간 인식에 달린 것이 아닌가? 이미 말했듯이 성서의 인식은 인간 인식에 달릴 것이 아니다. 성서의 명확성은 과학의 명확성과 종류가 다른 것이다. 과학적 접근과 말씀 인식의 접근은 다르다. 이런 것을 통해 과학적 명제와 성서적 명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과학주의적 사고에서 성서를 보지 않게 된다. 자유주의, 합리주의 신학, 비평학은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성경해석방법이다. 이 방법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말씀, 계시 자체가 인간 인식의 여부에 던져질 수 없는 것이기에, 말씀 자체에 의해 인식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과학적, 합리주의적 사고에 의해 말씀의 진리여부, 진정성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통찰은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과학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분만 그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고, 동시에 이것은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바 주어지는 것이다.


Q. 바르트가 말한 2차적 객관성은 성서의 계시사건에 국한되는 것인가? 성경이후 역사 내에서 발생한 신인식, 하나님의 계시 사건도 성경의 계시사건과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맞다고 하게 되면 성경계시의 완결성에 문제가 생긴다. 아니라고 하면 성령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Q. 주관적인 신앙고백을 어떻게 2차적 객관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말씀 인식의 명확성인지 자신의 노력에 의한 인식의 명확성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경우에 인간 인식의 결과로 주어진 것보다 명확하다. 인간 인식에 의해 진리에 도달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식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4. 인간의 책임성

이 부분은 바르트의 인간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코 하나님의 일방성만을 말하지 않음을 이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바르트에게 인간의 책임성 부분이 없다는 문제제기는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책임성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인간의 책임성에 대하여 신인식과는 다르게 접근한다. 바르트는 먼저 질문한다. :‘인간에게 책임성을 묻는다는 것이 무엇을 향한 책임성을 말하는가? 어떤 책임성을 말하는가?’그러면서 말한다. ‘우리가 의미있게 다루는 유일한 책임성은 기독교인의 책임성이다. 모호한 책임성을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이어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책임성도 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성이냐? 신인식의 책임성, 구원을 향한 책임성, 자유의지를 향한 책임성, 선행을 할 수 있는 책임성, 인식을 할 수 있는 인식론적 책임성 어느 책임성을 말하는가?’이런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1) 인간 (CD III/2 p. 70-130)

바르트는 인간이해에 따라서 책임성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크게 4가지의 인간론을 다루고 있다. :  ①자연주의 인간, ②관념론에서의 인간,③실존주의에서의 인간, ④유신론에서의 인간

바르트는 이 4가지의 인간이해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한계를 지적하면서 모두 반박한다. 어떤 것도 따를 만한 인간론이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그는  바른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바로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은 참인간이라 표현했다.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이 기독교인의 인간관이라는 것이다.러기에 말씀 속에 있는 인간에게만 책임성을 논할 수 있다.


2) 말씀 속의 인간 (CD III/2 p132~)

바르트는 참 인간이 무엇인가의 논지를 풀어간다. 그는 참인간을 예수에게서 찾는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아주 집중한다. 참인간, 즉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4가지로 정리했다. :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은혜 속에 있다는 것 ②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것. 이 부분은 바르멘 선언과 연결된다. 바르튼 참인간은 어떤 절대권력에도 복종할 수 없다라고 보았다. ③명령 속에 있는 인간. 성서를 읽는다는 것, 성서를 인식한다는 것,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성서를 이해를 위한 정보획득에 있지 않다.  성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아니한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언적 명령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은 선포이다. 강력한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받고 수행하는 인간이 참 인간인 것이다. ④감사 속에 있는 인간.

<종합>

바르트는 참 인간, 하나님과의 관계성, 즉 위의 4가지 특징의 관계성 속에 있는 인간은 새로운 개방성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 개방성이라는 말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참인간, 4가지 관계성 속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부여한 관계 속에서 스스로 결단하는 주체가 된다. 인간이 결단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가능하다. 바르트는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이 4가지 관계성 속에 있는 인간은 주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오는 인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는 참 인간은 개방성을 가지고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두발로 일어서고 스스로 하나님을 ‘주여’라고 부를 수 있는 성숙된 인간으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수동적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인간은 주체성을 회복하게 되고 놀라운 개방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참인간(말씀 속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심을 받은 인간이요 동시에 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이 부여한 소명에 대한 주체적인 매우 강력한 책임성을 가지게 된다. 책임성이라는 것은 이 부분에서만 논할 수 있다라고 보았다. 이 4가지 관계성 속에서 있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그리고 인간은 주체적으로 그 관계성 속에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책임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인은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인데,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신앙인으로서의 책임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인에게는 책임성을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 속에 있지 않는 자의 일반적이고 모호한 책임성은 논할 필요가 없다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의 책임성을 이렇게 정의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끝은 관계성의 확장이다. 이런 인간은 드디어 4가지 관계성 속에서 주체적으로 책임성을 가지는데, 개방성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개방성이라는 것은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개방성을 획득한 다음에 인간은 열려진 존재로 역사를 향해, 이웃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 지금까지 논한 바르트의 논의의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이러이러한 책임성은 논할 필요가 없다. 책임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인간론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4가지의 인간론이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아니다. 참 인간은 4가지의 관계성을 가진 존재로, 이 인간은 개방성을 가지면서 역사를 향한 놀라운 책임성을 가진다. 이 개방성은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간다.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종되었다는 것은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방성을 말하는 것은 다른 것에 대하여는 개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3월 23일

3) 관계의 확장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향한 책임적 존재이다. 이 존재는 거기서 끝나는 자기 폐쇄적 존재가 아니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말씀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은총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은총을 만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은총을 만나면 ‘은혜를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응답성, 책임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개방성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의미에서 동일하다. 개방성이라 함은 은총을 만난 인간은 자기 폐쇄적인 존재가 아니라 열려진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응답성이 없다면 그것은 은총이 아닌 것이다. 이 응답의 결과는 크게 3가지로 나타난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①자기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응답성으로 나타난다. ②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③시간에 대한 응답성으로 나타난다.

바르트적 표현에 의하면 인간이 가지는 모든 관계는 크게 4범주에 속한다. : 바로 ①가장 근본적인 관계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여기에 참 인간으로서 가지게 되는 3관계의 범주가 더해지는 것이다. ②이웃(타인)과의 관계 ③자신과의 관계 ④시간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정리가 되어야 이것을 토대로 관계가 확장이 되고 3가지 관계성이 다시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3관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타자와의 관계

여기서 바르트의 기독론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예수를 자주 모델처럼 인용한다. 그는 예수가 다른 인간과 고립된 인격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죄악된 인간, 죄 속에 있는 인간은 고립 속에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산 속에서 고립되어 수도를 한다고 해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해서 규명되는 존재가 아니다. 고립된 인성은 결국 바른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인격성을 인정하지도 함께 나누지도 못한다. 그래서 고립된 인간은 참 인간에 대한 모순이다. 고립된 인간, 폐쇄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고립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한 고립된 개체로서 존재한다면 자신의 참 존재에 역행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인간과 함께 하는 존재이기에 나는 존재한다.”인간은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의 실마리는 다른 인간과 함께 하는 자유와 기쁨 속에서만 찾아진다.

바르트의 인간론의 한 부분을 보면서 그가 대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바르트의 인간의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서구 개인주의적 사고와 개인주의적 성서해석을 넘어서는 사고이다. 바르트는 인간 자체의 규정에서 인간이 단절된 존재자체는 말씀 속에 있는 인간에 역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동료 인간과 바른 관계성 속에 들어갈 때만이 참인간이라 하여 공동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은 동료 인간에 대한 강력한 책임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굉장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기 폐쇄적 삶을 살았던 사람은 참인간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하나님의 나라는 나 혼자, 너 혼자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가는 곳입니다’라고 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가 자기체험중심이 되면서 개인 경건, 기도, 신앙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이웃을 향한 책임성을 간과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아주 바른 개인적 신앙을 가지는 것 같지만 바르트적으로 볼 때 참인간에 역행하는 것이다.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적 존재가 되어갈 때 바른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웃을 향한 책임적 존재를 경험해 보지 않은 인간은 참 인간의 의미, 존재에 대하여 기독교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이웃을 향한 책임적 존재가 되어 볼 때,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볼 때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철저히 타인을 위한 존재였다. 자기 자신은 하나도 없는 존재였다. 그를 바르트는 인간의 모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바른 관계를 설정하게 되면,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될 때, 그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기독교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기 성찰(명상, 해탈)로 답변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적, 사유화된, 자기만족적 인간론으로는 안된다. QT, 영성도 이런 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된다.


②자신과의 관계

바르트는 인간을 통적적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을 어떤한 각도에 보고 규정지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먼저 다음 3가지를 거부한다. :

㉠ 영육 이원론 거부. 이원론은 인간을 영과 육의 결합체나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로 본다. 이는 중세 정통주의 속에서도 있었다. 바르트는 기본적으로 이 형태로 인간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 육체, 몸에 강조점을 두면서 영을 삼켜버리는 추상적 물질주의, 혹은 물질주의적 단원론을 거부했다. 매우 피해야 될 인간론으로 보았다. 이것은 마르쿠스주의에서 많이 나타난다. 의학을 하는 사람에게서도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을 비주체화하는 것이 보았다.

㉢ 인간의 영을 유일한 가치로 내세우며 육체을 옷이나 잠시 스쳐지나가는 그림자나 저급한 것으로 보면서 영만을 강조하는 단원론도 거부했다. 이것은 인간을 비객체화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진정 자신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존재로 규명하고 있다. 인간은 통전체이다. 육적인 영, 영적인 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통전적 인간은 성령과 함께 하면서 항상 새롭게 규정되는 존재이고, 성령 속에서, 새로운 삶의 역동성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이다.  참 인간 속에 들어가면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새로워진다. 성령과 교제하면서 삶의 역동성으로 개방되어 있는 존재로 규정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3가지로 빠질 수 없다.


③시간 속에 있는 인간

바르트는 시간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 삶의 시간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 부분에 대하여 CD에서 ‘예수 시간의 주인’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수도 한 시간 속에 살았고, 한 생애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 존재는 시간 속에 있으며, 시간 안에서 의미를 추구하면서 산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시간 속에 있다. 우리에게 시간은 과거이며 미래라는 다른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는 우리에게 떠난 시간이고,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우리에게 아직 소유하지 않은 시간, 그러나 언젠가는 소유하게 될 시간이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더 이상이 아닌)와 미래(아직) 사이에 흐르는 단계 속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살므로, 시간에 대한 책임성, 역사에 대한 책임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바른 은총 속에 들어가면 우리의 흘러가는 역사에 대한 강력한 책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속을 떠나라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세속을 떠나고 단절을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예수는 세속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떠남은 다시 세속으로 들어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교회가 새로워지면 이 역사도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와 세속, 역사의 이원화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많은 교회 중에 역사와 이원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비성서적인 것이다. 신문도 보지마라, 역사에 대하여 관심갖지 마라....등

교회, 삶을 통해서 변화되어야 할 것은 시간이고 역사이다. 역사가 총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가 변화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교회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이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있는가 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교회, 목회관이 역사에 대한 책임성을 간과, 포기하고 이원화된다면, 그것은 예수가 하신 명령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할지라도 성서와 예수와는 상관이 없는 자기 계획, 자기 노력이 되는 것이다.

<전체정리>

인간은 고립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인간은 수련을 통해서, 혹은 철학적 성찰이나 정의를 통해서 규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3가지 범주에서 참인간이 규정지어진다. 이 3가지 범주는 역동적으로 상호성을 가지고 있다. 참인간은 타인에 대한 바른 관계(타인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알고 정말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역동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자기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러면서 이 역사를 향해 담대한 책임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바르트의 신학을 따르면 인간론이 없다거나, 인간의 역할, 책임성이 약하다는 것은 그릇된 지적이다. 오히려 그의 신학은 인간에 대한 강한 긍정성과 이 역사를 향한 강력한 책임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II. Emil Brunner (1889-1966)

흥미진진하게도 브룬너의 생애에 대한 체계적인 일대기가 없다. 단편적인 언급이나 소개글은 많다.   브룬너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좋은 2가지 자료, 간략한 자서전적 스케치이다. ①1955년 ‘a spiritual autobiography’ 이것은 일본저널에 실렸다. ②1962년 ‘intellectual autobiography’ 62년의 것이 좋다. 62년의 저술은 55년의 보충 및 확대한 것이다. 이것은 브룬너 신학에 대한 심포지움 책자에 실린 것이다.

1. 생애와 업적

1) 생애

1889. 12. 23 스위스에서 쭈리히 근처에서 출생했다.

1913. 쭈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1913-4. 영국에 건너가 고등학교에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했다.

1915. 스위스 쭈리히로 돌아왔다. 헤르만 쿠터(H. Kutter)가 삼기는 교회에서 6개월간 교구담당 목사로써 목회를 시작했다. 브룬너는 쿠터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1916. 조그마한 산골 마을 orstalder에서 단독목회를 시작한다.

1917. 마그릿(Margrit)과 결혼했다. 이 여성은 쿠터의 조카였다.

1924. 쭈리히 대학 교수로 청빙받아 이후 55년까지 이 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1938-39. 유럽, 영국, 미국 여러 대학에서 강연 및 활동을 했다.

1953-55. 쭈리히 대학에 적은 두면서 일본에 가서 도쿄국제기독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대학의 설립을 도와주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5. 쭈리히로 돌아와 바로 뇌일혈에 걸려 언어장애를 일으켜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1966. 4. 5 별세했다. 단순, 평온한 삶을 살다가 별세했다. 언어장애는 있었지만 정신을 말짱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로마서 8장에 심취하여 주석, 강론을 펼치기도 했다.

3월 30일

2) 사상적 배경과 업적 저술

*계통

아버지 쪽으로 거의 쭈리히 토박이다. 전형적인 스위스인으로 조상은 농부이다. 목회자 집안은 아니었으나 거슬러 올라가면 15-16C부터 이 지역에 거하면서 종교개혁의 전통, 그 중에서도 쯔빙글리의 전통과 직접 연결된다.  어머니쪽으로는 할아버지가 개혁교회의 목사였고, 부모 역시 개혁교회에 소속한 기독교인이었다. 계통에서는 그리 특별히 내세울 바는 없다.


*사상적으로

크게 종교사회주의 운동(Religious Socialist Movement)에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독일에서 생겨나 스위스로 들어왔는데 당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도 한때 여기에 연관되었다. 브룬너는 불룸하르트 부자를 통해 이 운동을 소개받는다. 개인적으로 아들 불룸하르트를 알았다. 사상적 영향은  헤르만 쿠터 를 통해서 받았다.

종교사회주의 운동은 굉장히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한마디로 평가하기란 힘들다. 큰 흐름은 당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보수적 루터주의에 반대하여 나타났다. 루터는 원래 강력한 역사책임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루터의 사상 중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두왕국 사상이다. 이 사상도 잘 이해하면 강력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축출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루터란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상을 이해할 때, 정치와 교회를 분리하는 식으로 해석했다. 하늘나라와 지상, 지상에서도 교회와 현실역사를 나누어서 이해했다. 이것은 루터파 중에서도 우경화된 보수파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루터파가 있는 곳에는 역사참여와 역사의식이 약해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물론 루터를 달리 해석하는 계통도 있었다. 그 계통에서는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교사회주의 운동은 당시에 교회가 역사 속에서, 1차 대전이 일어났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고 역할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두왕국 사상과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경화된 역사해석, 교회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을 미덕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역사의 암울함, 어두움 속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하는가 고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형성된 운동이 종교사회주의 운동이다. 더 이상 이 현실 속에서 신앙과 삶이 유리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모토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는 과격한 양상을 띠는 입장, 중도적인 입장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보수화된 루터의 두왕국 사상을 거부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의식있는 지성인, 목사들, 신학도들은 이 운동에 위로를 받았고 참여했다.


이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형태는 크게 3가지 전개양상을 띠었다. :

①학문적인 형태 - 종교사회주의의 신학을 정리하고, 이론화하고, 그것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는 학문적 작업을 했다. 이것은 주로 베를린 대학과 마부룩 대학을 중심으로 했다. 베를린 대학에서는 하르낙이 중심이 되었다. 하르낙은 종교사회주의에 학문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마부룩 대학에서는 헤르만에 의해 지지되었다. 두 학자의 영향력으로 인해 학생들에게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②정치활동을 하는 형태 - 신학과는 상관없는 쪽으로 나아갔다.

③불룸하르트 부자를 통한 형태 - 아주 확고한 성서적 토대를 가지고, 성령론적 해석을 하는 형태이다. 이들은 종교사회주의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이거나 단순한 사회참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역사참여가 왜 필요한지를 기독론적인 토대와 답변, 확고한 신학적,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참여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혹은 사회과학이론을 어떻게 원용할 것인가? 라는 것을 고심하지 않았다. 이들은 접근 자체가 달랐다. 어떻게 하든 현실 역사와 교회가 이원화 극복할려고 시도했다. 시도하는 모티브 자체가 단순하게 역사 속에서 이데올르기적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독론적인, 성령론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역동적인 우리의 참여와 신앙고백과 응답성으로 가능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그러기에 종교사회주의 운동 내에서도 그 적용과 실제 형태는 이처럼 다양했다. ①은 굉징히 학문적 접근을 했지만, 실제로 이 사람들(하르낙, 헤르만)은 부르주아적으로 살았지 그들의 삶 자체가 완전히 성령의 도구로 헌신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학문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실질적으로 학문과 삶의 조화를 이루고, 응답하는 삶을 살고, 교회를 새롭게 해내는 데는 실패했다. ②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정치적 차원으로 넘어갔기에 신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③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다.


①의 학문적 토대와 ③의 블룸하르트의 성서적이고, 역동적인 신앙고백적, 응답적인 요소들을 함께 현실참여에 적용할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에서는 배울 부분이 참 많으나 두 신학은 이와 연관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두 신학이 성령론적, 기독론적, 성서적이면서 이런 것에서 신앙고백적 응답성이 나왔다면 그러면서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삶 속에서 결단했다면 훨씬 더 풍요롭고 많은 사람에게 흡입력이 있고,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신학은 마르쿠스적 이념이나 사회과학의 틀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은 좋으나 너무 무리해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실상 성령론, 기독론적 토대를 상실하거나 우리의 신앙고백적 응답성, 책임성이 약화된 것 같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시대에도 왜 우리의 이 역사와 교회, 우리의 삶과 교회가 이원화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 gap을 메우기 위해 고심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미 나타난 종교사회주의의 전개양상 중에 ①과 ③을 함께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우리 시대의 gap을 메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학창시절에서 젊은 시절까지 브룬너는 특별히 2명, 헤르만 쿠터(브룬너 보다 한 세대 위)와 라가즈(L. Ragaz)를 좋아했고 개인적인 영향을 받았다.


1914년 박사학위 논문 ‘The symbolic Element in Religious Knowledge’ 을 발간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저술이 되었다.

이즈음 브룬너는 자신의 신학을 서서히 형성시켜 나간다. 이 즈음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1918년)이 나올 시점이다. 그는 바르트와의 개인적인 만남 이전에 이후 변증법적 신학으로 알려진 신학적 방향을 브룬너 본인도 서서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18년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나오자 브룬너는 바로 알아보고 열열히 환영하는 서평을 썼다. 물론 다른 사람도 서평을 썼지만, 무게있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관심있는 첫 번째 서평이었다 평가된다. 로마서 주석에 대하여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브룬너가 로마서 주석을 바로 알아보고 서평을 쓰게 된 것은 그가 비슷한 신학적 사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920년 초반부터 바르트와 한 그룹에서 함께 활동한다. 이 그룹에는 뚜루나이젠, 고가르텐, 메르쯔(G. Merz), 불트만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100년에 한명 태어날까 말까한 대신학자들이다. 이들이 한 시기에 함께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브룬너는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였다. 브룬너는 이들(뚜루나이젠)과 함께 설교집도 내고 ‘때와 때 사이’라는 잡지를 공동 발간하기도 했다. 이 잡지를 통해 당시 자유주의신학 대변지와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 모임에서는 주로 종교개혁가들, 그 중에서도 루터를 많이 연구했는데, 브룬너도 기쁨과 열정으로 참여했다.


1924년 ‘Mysticism & Word’(Mysticism or Word)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것이 브룬너에게 중요한 책이다. 초기 브룬너의 신학적 특징이 서서히 드러나는 책이다.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저술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바로 한 세대 이전에 신학계를 가장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를 비판했던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을 제대로 공격한 일련의 저술 중 가장 앞선 책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보자. : 본서에서 브룬너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정립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적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정립하고 설명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브룬너는 신앙을 큰 2개의 범주로 대조시키고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책을 저술했다. 2개의 범주라 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거나(이것이 바로 슐라이에르마허를 공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체험을 했다, 느낌을 받았다. 감동을 받았다 등이 모두 포함된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거나 이 둘 중 하나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자를 결국은 신비주의가 될 것이라 다시 규정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대표적 유형으로 슐라이에르마허를 들었다. 후자는 Word, 말씀으로 규정했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 유형은 사도와 종교개혁가들이라고 들었다. 결국 슐라이에르마허가 대신학자이기는 하지만 그 쪽으로 나가게 되면 무언가 자기 체험이 있어야만 만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 만족감은 감정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형태든 자기체험이나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다 신비주의이다. 이것과 대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유형, 즉 나의 종교적 체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나 자신을 세우고, 말씀이 중심이 되어 거기에 나를 판단받는 신앙의 유형인 것이다. 이 점에서 구조가 바르트와 거의 동일하다.  길은 다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신비주의 or 말씀이냐를 모토화했다.

너의 신앙은 신비주의냐 말씀이냐? 이 모토가 유럽에서 알려지고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브룬너는 유명하게 되었다. 이 책은 폭넓게 호평을 받았고, 그래서 이 책 이후 쭈리히 대학에 조직신학교수로 청빙을 받았다. 이 이후 아주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친다. 브룬너가 이 책 이후로 자기 신학에 확고한 입각점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도 조금 밝히고 있고, 이후의 왕성한 저술활동했지만 거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브룬너를 이해하기 위해 잊어서는 안 되는 몇 가지 key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공동체, 설교, 대화이다. 그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교회의 현장성을 중요시했다. 그는 교회, 기독교인의 공동체를 아꼈고, 그래서 어떻게 이 신학이 기독교인의 공동체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고심했고, 그러기에 기독교 신학의 대화성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이런 것들이 브룬너의 신학을 형성하는 특징적 요소였던 것이다. 한번도 여기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간론에 대하여 쓸 때도, 이것이 설교로 가능할 것인지,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인지, 젊은이들과 대화가 될 것인지를 고심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순수신학을 아주 우습게 여겼다. 이론 자체는 무의미하게 여겼던 것이다. 교회를 위할 때만 신학이 의미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노인이 되어서 자신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모든 신학, 철학에서의 노력, 공적들이 철저히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었고, 그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먼저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 했다. 이후로 자신이 연구하는 신학과 철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교통할 수 있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저술은 롬1:161)에 근거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모든 신학과 철학의 목적이요 방향은 복음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1927년. ‘The philosophy of Religion from the standpoint of protestant Theology’ 개신교신학의 관점에서 본 종교철학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신학과 철학의 갈등문제를 다루었다. 그렇게 중요한 주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동일한 해 가장 중요한 저술 중 하나인 ‘The Mediator’를 출판했다. 바로 기독론 책이다. 아주 두꺼운 책이다. 어떤 역사적 위치를 가지는가 하면 변증법적 신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진 체계적인 기독론을 서술한 최초의 책이라 평가된다. 이 책으로 인해 브룬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1928년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의 강연과 초청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 중년 브룬너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한 2가지 사상이 있다. ①  ‘Oxford Movement’이고 ②F. Ebnery M. Buber의 I-Thou 철학(Truth & Encounte)이다.

①Oxford Movement

영국에서도 교회와 신학에 대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31년경 스위스에도 들어온다. 브룬너는 이 운동의 핵심을 바로 이해했고, 여기에 심취했으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운동은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촉구했고, 공동체성에 대한 새로운 부흥운동을 꾀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평신도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서 새롭게 정립하는 운동이었다. 당시 영국의 성공회는 카톨릭과는 다르지만 개신교와는 다른, 사목중심의 형태였기에 평신도의 역할이라는 것이 아주 미미했고, 교회가 현실 역사에 바른 참여를 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평신도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각성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브룬너는,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바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확고하게 신학은 단순히 신학자만의 것이 아니고, 교회 공동체와 평신도에게 실제적으로 연결이 되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고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신학이 이론작업으로만 끝날 것 같으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동체와 평신도와의 연결작업을 시도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히려Oxford Movement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신학적 이론작업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 통찰을 가질 수 있다. : 어떤 신학이든 이론신학일 수만은 없다. 어떻게 이 신학이 현재적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기여하고 역사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를 고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를 고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제대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수적이다. 지금 일부 교회를 보면 장로교의 잘못된 폐단으로 인해 교회가 너무 장로중심이 되어서 목회자가 아무리 훌륭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도 그 신학을 교회에 뿌리내릴 수 없다. 교회가 그 신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또 다른 경우는 목회자가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지만, 정작 신학은 없고, 평신도는 너무나 소극적이어서 수동적으로 따라오기만 하고, 교회 공동체에 적극적인 참여를 할 수 없는 경우이다. 이 두 극단적인 형태를 어떻게 극복해 내면서 교회가 바른 공동체성을 가져나가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은 목회자와 평신도인데, 목회자와 평신도가 어떤 관계성을 가지면서 공동 작업을 해내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어떻게든 신학은 교회공동체와 평신도를 연결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 고심해야하는 문제이다. 대안으로는 일단 목회자가 뚜렷한 신학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설교를 통해서든, 교육을 통해서든, 교사대학을 통해서든, 끊임없이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훈련을 전개해야 한다. 알면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목회적인 관점이다.


② I-Thou 철학

이것은 아주 철학적이지만 브룬너에게는 아주 신학적인 적용을 해낸 것이다. 이것은 브룬너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철학을 접하면서 브룬너는 한단계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된다. 한 명은 에브너(F. Ebnery)이고, 다른 한명은 부버(M. Buber)이다. 둘 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I-Thou의 철학의 체계를 놓았다. 브룬너는 이들의 철학을 접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인간론에 적용시키고, 자신의 인간론을 정립시킨다.

서구의 사상사, 신학사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주객도식이었다. 이것의 극복여부가 모든 분야의 관건이었다. 철학에 있어서 인식론의 문제, 즉 인식하는 주체로써 인식의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는 중요한 주제였다. 이것은 신학에 있어서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신학에서 인식의 대상은 신인데 이때 어떤 인식의 방법론을 적용할 것인가? 이것은 신학적 난제였다. 바르트는 주객도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라고 구조를 뒤집었다. 이것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주객도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대상이 하나님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브룬너는 나름대로의 인간론으로 이 주객도식을 극복했다. 그는 주객도식의 합리주의적 인간이해를 극복하고 신 앞에서 책임적 존재로써 성서적 인간론을 어떻게 형성시킬지를 제시했다. 이것이 바로 브룬너 인간론의 핵심이고, 이것은 I-Thou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이후로 유명한 ‘만남으로서의 진리’(Truth & Encounter)라는 사상이 나왔다. 그는 1938년 이것을 토대로 강의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복음은 I-Thou의 인격적 만남 없이는 깨달아질 수 없다는 것, 주객도식의 인식론으로는 신앙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본인 스스로 ‘만남으로서의 진리가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지침이 되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이 되었다.

1930년대에 7-8년 이상에 걸쳐 이런 큰 2가지 흐름이 나왔던 것이다.


1931년 'The Word & The World'라는 책을 저술했다. 본서도 호평을 받았고, 그의 주요저술 중 하나이다. 논문이나 다른 학자들에게 많이 인용되지는 않았으나 브룬너의 사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브룬너는 서문에서 본서를 저술한 목적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 ①현대인들이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성서를 읽으면 gap(장애)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 방향제시가 저술 목적이다. 그래서 제목자체가 말씀과 이 세상인 것이다. ②브룬너는 교회를 생각하는 학자여서 변증법적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 변증법적 신학을 그 시대에 발전시켜야겠다는 것이 또 다른 저술 목적이다. 초기 기독교가 타문화권에서 문화적 충돌을 일으켰을 때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변증가들이 등장했었다. 브룬너는 오늘 이 시대도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변증가를 요청한다고 보았다. 브룬너의 이러한 견해는 훌륭한 통찰이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것 이상의 어려움을 우리는 당하고 있다. 과학의 문제, 인간복제의 문제, 가상공간의 문제 등 다양한 시대적 문제 앞에서 기독교진리를 향한 변증가적 자세와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지금 어디에서 신은 진지하게 논할 수 있는가? 기독교 자체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지금 대두되고 있다. 오늘의 도전에 우리는 전 실존을 걸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책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와 맞지 않으나 의도와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1932. 'The Divine Imperative' 를 저술했다. 1930년대가 되면서 그는 인간론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본서는 브룬너의 인간이해가 아주 잘 드러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브룬너의 윤리적 관심을 드러낸 책이다. 윤리란 구체적인 삶을 논하는 분야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의 방향을 제시하고, 삶에 대한 결정을 내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윤리에서는 인간이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20C 이후로 상황만을 중요시 여김으로써 방향제시를 잃어버리고 상황윤리가 되었다. 이것이 현대 윤리학이 공동으로 가지는 문제점이다. 그런데 브룬너는 본서에서 구체적인 인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윤리적인 방향을 제시하는데 크게 2가지 흐름으로 나타난다. : 그는 가장 으뜸이 되는 하나님의 윤리적 범주를 사랑으로 잡고, 다른 정언적 명령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윤리를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5단계로 논한다. 본서는 일반적으로 브룬너의 책 가운데 가장 폭넓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 기독교 윤리의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 윤리에서 고전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이 책은 윤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윤리라는 것은 시대적 정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The Mediator와 같은 신학적 저술에서의 신학적 통찰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살아 숨쉬는 저술이라 하겠다.(김동건 교수는 신학적 저술을 본서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1934. Nature and Grace. 바르트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술이다. 바르트는 이 저술을 읽고 No라는 책으로 답변을 한다. 이미 말했듯이 브룬너는 30년대 지속적으로 인간론에 관심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 이해를 위한 새로운 신학적 작업을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본서였다. 인간에게 어떠한 책임성, 어떤 형상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는 인간학이 본서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논쟁이라는 신론적 입각점에서 브룬너를 다루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룬너는 바르트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개정판을 내면서 바르트의 입장에 반박했던 것이다. 둘은 각자의 입장에서 논지를 펼쳤던 것이다. 둘의 point가 달랐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격렬한 논쟁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불러 일으켰다.


1935년에는 2가지 작은 책을 출판했다. 먼저 'on the Work of Holy Sprit'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령론 책이다. 본격적인 성령론 책은 아니다. 옥스퍼드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 실존의 여러 차원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성령이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시는가)를 평신도들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저술한 책이다. 두 번째는‘Our faith' 우리의 신앙이다. 이것은 19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쉬우면서도 브룬너의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브룬너가 가장 소중하게 손꼽는 책이기도 하다.


1937. 반역 속에 있는 인간‘Man in Revort’바르트와 격렬한 논쟁 이후에도 브룬너는 여전히 인간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본서는 전형적인 인간론에 대한 저술로, 1차대전 이후 변증법적 신학관점에서의 인간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첫 저술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후로도 브룬너는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만남으로서의 진리‘Truth as Encounter’책이 저술된 것은 이 시기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만남으로써만 알게 된다. 단순인식으로서는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서는 기독교 진리의 특징을 가장 매력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브룬너 전문가들은 본서를 브룬너의 사상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책이라 평가한다.


1941. ‘Revelation and Reason the Christian’: 부제-신앙과 지식에 의한 기독교 교리‘Doctrine of faith and knowledge' 본서 자체는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본서는 다음에 이은 그의 대작의 기초 토대를 이루는 책이기에 중요한 책이다. 본서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인간의 자기 인식을 대조시키고, 자신의 사상을 펼치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1946-60. ‘Dogmatics' 3 Vols. 1권 신론(46년경), 2권 창조와 구속(50년경), 3권 교회와 종말(완전히 완성하지 못했다.)


1950s. 교회에 대한 오해 ‘The Misunderstanding of the Church’2Vols 본서도 아주 중요하다. 브룬너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 시기가 되면서 브룬너는 에큐메니칼 회의와 교회일치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였고,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본서를 저술했다. 본서에서는 교회가 기구, 조직으로 전락, 그래서 진정 그리스도의 영을 상실해서 역사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1954. 영원한 희망‘Eternal Hope' 출판했다. 주저에 속하지는 않으나 특이하게 종말론과 연관된 책이다.

그는 마지막 작업으로 'Truth as Encounter'를 개정하여 'The Divine-Human Encounter'를 저술했다. 이때는 이미 몸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은 온전했기 때문에 저술을 할 수 있었다. 중요한 부분은 거의 변화가 없고 가장 큰 차이는 55p에 해당하는 상당히 긴 서론적 기술이 앞에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론자체는 사상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부인 마그릿이 1914-62년 까지 책과 논문을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모두 396권이었다.


4월 6일

2. 사상

1) Eristic Theology

이것을 통해 브룬너의 신학적 방법론,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Eristic은 ‘논쟁, 대화’이다. 브룬너의 신학을 ‘논쟁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화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브룬너는 변증법적 신학자가 가지는 여러 가지 특징을 바르트와 공유하고 있다. 이 둘은 너무나 유사했기에 자연신학 논쟁을 벌였을 때 사람들은 둘이가 같은 입장인데 왜 저러나 하고 놀랐다. 둘은 아주 섬세하게 달라졌지만, 전체 다양한 신학적 흐름에서 보면 둘은 유사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큰 뼈대는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이 둘의 차이를 이야기한다면 바르트는 ‘무엇’에 관심을 더 가졌고, 브룬너는 ‘어떻게’에 더 관심을 가졌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단순화시킨 것이기에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

브룬너는 자신의 신학적 고뇌의 핵심에 말씀(복음)이 현 시대의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 어떻게 설교되느냐에 대한 관심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관심은 항상 선교적 관심으로 쉽게 발전했고, 동시에 동시대의 지성인들에게 어떻게 대화성을 가지는 신학을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는 자전적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설교가이다. 설교가로써 교회문전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자문하고 이제는 지쳐 침묵 속에, 좌절 속에 있는 그들에게 나는 무엇인가 대답해야할 의무가 있다.’브룬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했고, 이것이 그의 신학의 이유, 목적, 방법론의 출발이라 했다. 브룬너는 다른 어떤 신학자보다 이 부분, 즉 신학함의 목표, 목적이 분명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하나님 혹은 인간, 그 어느 쪽의 독백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보았다. 어느쪽에 강조점을 두어서 일방적이 되어 독백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신학은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위에 서야 한다라고 보았다. 이런 그의 신학적 출발로 인해 그의 신학적 방법론을 ‘대화신학’이라 부른다.

그래서 브룬너에게는 구체적으로 현대의 여러 상황 속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신앙행위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저술, 즉 정치적인 상황, 사회적 상황, 윤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에 관한 저술이 아주 많다. 대화를 근본으로 삼는 그의 신학은 결국 교의학적인 관심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복음이 현실 속에서 사회정의와 연관되는지에도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하면, 기독론, 교회론이라 하여 교의적으로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만 신학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가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어떤 구체적인 사회 정의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연관되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관시켰던 것은 그의 신학적 특징이 ‘대화신학’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전달되고, 우리에게 의미가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상호성을 포기할 경우 신학의 존재의미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반드시 신학은 깊게 뿌리박고 관심을 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대화를 위해서 신학하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의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론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때의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재적, 현실 속의 인간, 현대의 시대정신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이요, 구체적 상황 속의 인간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상황, 인간에 대한 이해에 많은 초점을 기울였다.

문제는 인간은 자기의 상황을 각기 다르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져 있는 답이나 주어져 있는 결론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우리도 충분히 이해한 후 자신이 처해진 삶의 자리에서 적용해 내는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주어져 있는 답이나 결론은 현실 속에서 공허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하나님께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식, 즉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가야 한다라고 보았다.

신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학자는 평신도가 자신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답변을 제대로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 방법론을 ‘Christian Socratics'라고도 불리운다. 이렇게 불리는 것은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론2)과 유사한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신학자는 현실 인간이 가지는 부조화, 모순, 잘못된 가치의 추구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지적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 무관심한 신학자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선포에 교인들을 몰고 갈 것이라 보았다. 신학은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현시대의 인간이 잘못된 추구와 의미, 목적상실에 있음을 일깨워 줌으로써,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대화적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근본적 역할이라 믿었다.


2)인간론 :관계 속의 인간

바르트와 함께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말을 했다면 이제 브룬너와 함께 인간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브룬너의 신학은 대화신학이라 할만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이때 인간은 막연한 철학적, 총체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 있는 현재의 인간이었다. 그는 자연신학에서 인간론에 대한 초석을 쌓았고, 다음 ‘반역 속에 있는 인간’에서 가장 신학적 인간에 대한 분석과 정리를 잘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강의는 그의 주저, 반역 속에 있는 인간’에 의존해 있다. 인간학의 의 브룬너가 기대하고 목적한 바는 무엇인가? 그는 이 인간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주객도식을 극복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주객도식을 극복했지 않은가!) 브룬너는 전혀 다른 구조에서 주객도식을 극복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1) 인간의 근본적 범주

I-Thou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말은 페르히난드 에브너와 마틴 부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브룬너적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면서 논의를 계속하자.

인간에게 I-Thou의 철학으로 접근했다는 것은 인간을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된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물을 수 없다라고 정의했다. 독립된 개체로서 나는 누구인가는 물을 수도 없고, 답할 수도 없다라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관계적 실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반드시관계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있고 그 다음 그 인간에 따른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 자신의 존재가 규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적 인간 개체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이 선하다거나 악하다라고 규정지을 근거가 없다. 그가 가지는 관계에 따라 그가 선한지, 악한지, 즉 존재 자체가 규정되고 결정된다라고 보았다. 인간은 피조물, 다른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선성설이나 선악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동서양의 인간 존재가 무엇이냐,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모든 질문을 거부했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어떻다고 규정지을 수 없고, 객체적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은 그냥 규정될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그가 맺는 관계를 보니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관계가 먼저 있고 인식이 있다. 관계가 먼저 있고 존재가 따라온다.


인간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크게 2종류의 관계 속에 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2관계중 하나에 속에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I-It, 다른 하나는 I-Thou이다. 이 두 가지의 관계성을 인간은 가진다. 어떤 관계든 이 2가지 관계의 범주 속에 속한다. 자연, 인간 동료, 신, 무엇과 만나든, 상대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It으로 만날 수도 있고, Thou로 만날 수도 있다. 이는 두 가지 관계의 본질적 형태(성격)를 의미한다. 내가 만남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어떤 태도, 관계성으로 만나느냐에 따라서 결국 나의 존재 양식이 결정된다. 내가 상대를 I-It로 만나면 내가 It가 되고, 상대를 I-Thou로 만나면 내가 Thou가 된다는 것이다.


   ** I-It의 관계

그러면 I-It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관계는 크게 이해관계, 소유관계, 목적관계로 규정 내지는 설명할 수 있다. 이 관계의 특징은 관계의 핵심이 주관적인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대상인 It은 항상 수동적 일방성만 유지된다.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나의 주관성 속에 머물면서 상대방은 나의 필요에 따라 만나고, 상대를 대한다. 나의 전 실존을 걸어야 할 필요가 없다. I-It의 관계의 특징은 3가지로 표현된다. : ①경험과 이용 ②주객도식 ③간접성


①경험과 이용(Experience & Using)

대상이 무엇이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내가 그 대상을 It로 만난다면 나에게 핵심이 있고, 상대는 항상 수동적 일방성으로만 만나진다. 이 관계의 범주에서는 대상을 자신의 경험과 목적에 따라 사고하고 상대하는 것이다. 어디까지 나는 내 중심성이라는 자기 주관성을 중심에 두고 그에 대하여 가진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 사람은 이렇게 하니 이렇게 행동하더라’생각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접근한다. 필요한 만큼 사용한다. 자신의 경험과 목적에 따라 상대를 만나고 상대를 수동화시키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낸다.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 그래야 이요할 수 있는데...’라는 식이다.


②주객도식

인간이란 자기 주관, ego로써 상대를 만난다. 그때 나는 나의 주관성 속에 있을 때, 상대는 객체로써 보게 되고 만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상대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소유로 보게 된다.


③간접성

나는 나의 ego에 따라 상대를 판단하고 인식한다. 나의 ego 속에는 이미 객체로서의 상대에 대한 경험전이해가 축적되어 있다. 그것을 토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하는 상대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성을 가지지 못한다. 살아있는 관계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성이 상실되고 간접성이 나타난다.


I-It관계, 위의 특징을 가진 관계는 어떤 관계에서 적합한가? 이것은 인간과 사물의 관계이다. 단지 알면 그것으로 끝나는 관계이다. 이때 나는 It에 대한 주체이고, It는 나에게 알려지는 객체이다. 이때는 인격적 만남이나 나의 인격적 결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 간의 관계의 대부분도 여기에 속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브룬너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 간에 서로를 I-It로 만날 때 상대는 서로에게 알려지는 객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대상화이다. 갑자기 혼자라는 것을 알고 놀랄 때가 있지 않는가? 스스로 모두를 대상화 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갑자기 옆에 있는 친구가 생소한 타인으로 느껴지지는 않는가? 이 모두는 우리가 상대를 I-It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It화 시킨 것은 결국 나를 It화 시킨 것이 된다. 이미 말했듯이 관계가 나의 존재양식을 규정시킨다. 타일을 It화 시킨 것은 결국 나를 It화, 대상화 시킨 것이 된다.

인간은 상대를 대상화하는 가운데, 부모, 가족, 자식조차 대상화하면서 스스로 공허 가운데 무화시켜 왔다. 단계별로, 즉 일반적 범주와 신학적 범주에서 이런 It화된 인간에 대해 논해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범주에서든 인간 내부에는 불안(Anxiety)가 도사리고 있다. It화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근원적인 불안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형태로 다가오게 된다. Fear도 불안이다. 여기에는 대상이 있다. 권총, 주먹과 같은... 그러나 Anxiety는 훨씬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다. 상대를 It화시킴으로 스스로 It화 되어버려 Anxiety가 실존을 덮쳐버린 것이다. 아무런 표면적 이유가 없어보이지만 말이다. 뭔가 왜소해져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 범주에서의 It화된 인간을 살펴보자. 심리, 철학, 교육학적인 응용이 필요하다. 물론 브룬너도 이것을 깔고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 에리히 프롬, 교육자인 삐아제... 여기에 영향을 주고 받은 이들이 많다. 이러한 Anxiety 속에 있는 인간이 된 것은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분리가 내재되어서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Anxiety를 해결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본능적 시도는 일차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랑을 통해 분리와 고독, Anxiety를 극복하고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바라는 것이다.

브룬너와 부버에게 사랑이란 하나의 활동이며 영혼의 힘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특정 사람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배제한다. 이런 사랑, 즉 특정 사람에게만 사랑을 하고,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랑은 확대된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사랑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능력, 영적인 힘, 능력이다. 대상에 의해 성립되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멋진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하여 오해한 것이다. 대상이 가치를 상실한 순간 사랑이 사라져 버리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은 대상에 딸린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영적인 능력이다.

인간에게 왜 Anxiety가 왔는가? 인간은 태초부터, 태어날 때부터 이런 분리를 경험한다. 이것이 심리학자들의 견해이다. 모든 관계와 분리되는 느낌을 가지는 순간 Anxiety를 경험한다. 분리의 경험이 불안을 야기한다. 언젠가는 완전한 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허무에 몸서리치게 된다. 그래서 이 분리를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인간은 단절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본능적 시도는 유아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행위부터 시작하여 자라면서도 다른 형태로 계속 시도된다. 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 이 분리를 극복하려는 사람도 있고, 목표달성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 이 분리를 극복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단 목표가 달성이 되면 다시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이 연합이나 일체감을 사랑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연합이나 일체감으로는 진정으로 대상화를 극복할 수 없다.


프롬의 이해에서 도움을 받자. 프롬은 사랑의 행위, 일체감으로 Anxiety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형을 3가지로 보았다. 강력한 3가지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

①형제애 -친구간의 사랑을 포함한다. 이것은 모든 사랑의 기본적 형태로 동동한 자 간의 사랑이다. 일방적 의존 관계일 경우에는 형제애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동등할 수 없다. 이 점이 사랑의 기술에서 지적된다.

②모성애- 사랑의 대표적 형태이다. 불평등한 관계의 사랑을 말한다. 일방적이다.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성장한다. 그리고 분리되어야 한다. 일방적 사랑은 일시적이다. 결국 이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장하면서 적절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지 못할 때, 두 객체 모두는 더 위험해 질 수 있다.

③성애- 남녀간의 사랑이다. 이것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성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분리를 체험하고, 실존적 불안에 몸서리친다. 이 고독과 분리를 다른 개체와의 결합을 갈망하며 극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모두가 타자로써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분리, 고독 속의 인간에게 어느 순간 타자와의 벽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하나라는 경험, 분리가 극복된 듯한 경험, 환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상 갈망, desire이지 사랑이 아니다. 갈망과 사랑을 혼동한 가운데 이 관계는 지속된다. 그리고 분리가 극복된 얼마의 시간을 공유한다. 이 시간 동안 합일, 일체감을 느끼며 분리를 이겨낸다. 강력한 끌림 속에서, 놀랍게도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느끼지 않고, 참으로 분리가 극복된 듯 보인다. 그러나 다시 어느 순간 갑자기 상대가 낯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우리라는 하나만 있다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 나와 다른, 내가 아닌 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구나! 이렇게 되면 일체감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저 남자를 좋아했던가, 저 사람과 일체감을 느꼈던가 라고 느끼며, 일체감이 아니라 욕망의 표출이었다는데 배신감을 느낀다. 일체감을 강하게 경험하면 경험하는 만큼 강한 분리를 경험하게 되고, 더 강한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분리와 불안은 내 내부의 것이지 대상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게 된다. 그리하여 더 엄청난 허무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또 다시 자신을 자식과 일체화시킴으로 극복하고 시도하기도 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대상에 딸린 것이 아니다. 분리를 극복하려던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백치’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 이상적 인간을 그리고 있는데, 그 모습은 백치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상화(분리, 불안)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대상을 통해서 그것이 극복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대상에게서 극복되지 아니하면 다른 대상을 찾아서 방황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상을 통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숙한 인간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극복되지 않는 분리, 불안을 경험하는 존재, 이것이 현인간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4월 13일

I-It를 어떻게 신학화할 수 있는가? 신학의 범주에서 I-it의 관계를 논해보자. I-It의 관계에는 주객분리가 일어난다. 주객도식의 이원론은 인식론적 이원론3)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인간의 사고구조를 지배했다. 이 구조가 한번 틀을 잡으면 여기서 벗어나기란 힘들다. 무엇이든 이 구조 안에서만 이해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도 이 구조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인식론적 구조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객체로 다가오고 이해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It로 , 즉 인식의 대상으로 관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신이 공허하게 다가오는 이유라고 브룬너는 말한다. 하나님을 It로 만나면서 하나님도 대상화되어 버렸다.

틸리히도 인간이 이것을 빠져 나가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 세계 속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그것이 피조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숭고한 우수다.’피조물의 한계요, 슬픔이라는 것이다.


  ** I-Thou의 관계

그렇다면 이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I-It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가? I-Thou의 관계는 인격적, 실존적 만남을 통한 관계이다. 대화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관계에는 4가지 특징4)이 있다. : ①상호성 ②직접성 ③현재성 ④집중성.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Key는 현재성이다.


①상호성(Mutuality)

이것은 만남, 관계 속에서 목적이나 이해관계가 배제되는 관계이다. 특수한 목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I-It의 만남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한 쪽의 우세한, 일방성은 상실된다. 목적에 의해서 만나면 일방적일 수밖에 없지만 목적이 배제되기에 일방성, 피동성은 사라진다. 의무적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는 인격적 대향(마주함)이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②직접성(Directness)

어떤 선험적 지식이나 관념이 이 관계에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향이 일어난 직접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이것을 브룬너는 Exclusiveness라 부른다. 다른 것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다.


③ 현재성(Presentness)

I-It의 관계에는 과거성이 있었다. 그러나 I-Thou의 관계에는 현재성에 초점이 있다. 인격적 대향이 이루어지면 관계를 통해서 I와 Thou 모두가 현재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현재를 단순한 시간의 흘러감으로 보지 않는다. I-It가 만날 때는 지금, 현재에 만나지만, I는 경험, 선험적 지식으로 상대와 만나기 때문에 상대를 현재적 존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존재로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성 안에서는 어떠한 현재적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케이라는 학자는 예수의 특징을 접촉성이라 했다. 예수가 직접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그 만남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그 만남은 현재적으로 늘 새로웠다. 1:1의 대향으로 늘 새롭게 인식되었다.

현재를 시간적 우선순위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창의적 사고이다. I-It의 관계는 과거적이고 흘러간 관계이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I-It로 만날 때도 그 관계, 만남에는 과거성과 간접성만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관계에서는 아무리 자기체험을 강화한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현재적으로 만나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I-It의 관계에서 사로가 양적으로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결국 흘러가는 과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과거성을 가지므로 결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현재는 지금이 아니다. 바로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현재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가 현재가 아니다.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현재이다. 바른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순간 둘 사이에 현재가 존재하며, 나는 너를 통해 현재가 되고 너는 나를 통해 현재가 된다. 더 이상 과거적 존재가 아닌 현재하게 된다. 나는 I-Thou의 관계를 통해 현존한다.

나와 하나님이 이 I-Thou의 관계로 들어갈 때, I-It의 과거성(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라는 개념 덩어리, 경험에 의한 집합물, 들었던 하나님)은 사라지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시간성, Gap이 극복되고, 현재성이 자리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시는 하나님,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된다. 그가 ‘삭개오야’부르셨듯이, 나는 그의 아들, 그의 딸이 된다. 그 순간 하나님은 공허한 이름이나 개념(과거성이 개념이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나와 함께하는 현존하는 존재가 된다. 그와 나는 마주하고 대향하고 있다. 그때 양적인 시간은 무의미하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가 된다.

④집중성(Intensity)

외부에서의 Gap이 배제된 절대적인 관계, I-Thou에만 전념하는 절대적 관계이다.


  <정리>

부버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같은 구조에서 보았다. Eternal Thou 영원한 너. 내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I-It의 이원론적 구조에서는 신을 체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주객도식에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①인식을 통해서 ②체험을 통해서. 그러나 I-It의 구조에서는 양쪽 모두 불가능하다. 전자는 대상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안되고, 후자는 일방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안된다. 대향이 상실된다. 그러므로 유일한 방법은 다른 접근이어야 한다. I-Thou로 전향해야 한다.  I-It의 구조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의미없는 신, 개념일 뿐이다. 이 구조에서의 하나님은 현재성 속에서 고백되는 나의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대상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It일수도 있고, Thou일수도 있다. 예술품도 It으로 만날 수도 있고, Thou일 수도 있다. 위에서 4가지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또 다르게 사랑과 정신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을 감정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감정과 비슷하지 않다. 질이 다르다. 어느 한편에서 다른 한편으로 옮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소재(장소)이다. 감정은 인간 내면 속에 존재한다. 내가 미워하고, 내가 느끼고... 인간이 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내 속에,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이 온당한 표현이다. 사랑은 인격적 대향이 이루어질 때, 그 관계 사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고 존재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개체가 일방적으로 던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버는 사랑이 두 인격적 관계 속에서 나타난 책임성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부버는 말한다. 사랑은 내가 당신을 향한 책임성이다.


정신 내 속에 있거나 나와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도 관계 속에 있다.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정신이다. 부버는 I-Thou의 관계 속의 인간을 자유인이라 했다. 이 인간은 스스로를 물화시키지 않는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다. 이해관계와 목적으로 만나지 않기 때문에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I-It는 감정에 따라 만나고, 성취에 따라 만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버린다. 그러나 자유인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2)한 개체의 인간에게도 관계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규정지으면 한 개체의 인간에게도 관계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상대가 없을 때, 타자가 없을 때도 가능할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의 시도가 인간론이다. 매우 다양한 답변들이 있었고 브룬너도 답변했다. 브룬너는 이렇게 답변했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다’브룬너의 신학을 대화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도 연관성이 있다. 인간은 질문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는가? 그렇다. 자신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기에 인간이고,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자신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지금의 자신보다 한단계 높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시에 현재의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self-ego에 닫혀진 존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혼자이고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현 존재의 생각과 행위는 오히려 현재의 나에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초월해 있는 존재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의 개체나 ~이 아니다. 인간은 현존재와 초월적 존재의 관계 속에 있다. 현 존재를 초월해 미래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미래적 요소가 현재의 생각을 지배한다. 현 존재와 초월적 존재 사이에 관계성이 있는데, 초월적 존재가 현존재를 지배하고, 영향을 미친다. 그 관계에서 현존재가 규정된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 이것은 사실 It에 불과하다. 나의 계획, 나의 꿈, 목표는 사실 It이다. 이것을 우리는 진정한 희망인 줄 알고 살아가면서 그것의 성취 여부에 따라 일히일비한다.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면 일히하고, 기대에 부합하지 않으면 일비하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관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앞으로 지향하는 나는 누구인가? 큰교회? 결혼?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은 It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현재의 인간 자체가 It화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도달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대상된 목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목표를 향해, It을 향해 매진하며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자는 진정한 자신을 한번도 경험하지도 못하고 현재화되지도 못한 것이다. 진정 인간의 한계가 극복된 자신의 Thou와 관계하며 고뇌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Thou에 실존을 거는 것이 아닌 It에 매진하게 될 때 인간을 지으신 이가 웃으신다. 브룬너의 표현이다.

이것은 I-It와 I-Thou의 관계를 인간 개체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마저도 I-It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성이 왜곡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진정한 나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3)Real Man과 True Man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현 자아(self)와 초월적 자아 사이에서 존재한다. 여기서 문제는 초월적 자아이다. 어떤 초월적 자아를 가지는가? 그것이 어디로 오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초월적 자아에 따라 현 존재가 규정된다. 초월적 자아는 때로 현자아의 자기투사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초월적 자아는 It이 된다. 브룬너는 현자아를 Real Man이라 하고, 초월적 자아를 True Man이라 했다.

True Man은 It이 아니다. Thou로서의 True Man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참인간은 처음과 끝이 모두 말씀에 근거해 있다. 책임성은 얼마나 말씀에 따라 사느냐에 달려있다.

Real Man은 현재의 나인데, 이 현재의 나의 기원도 말씀이다. 기원은 True Man이나 Real Man이나 동일한 것이다. 차이는 Real Man이 이 사실, 즉 자신의 기원이 말씀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 책임성을 망각하고서,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인간은 반역 속에 있는 인간(Man in Revolt)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Real Man은 True Man과 기원이 같으나 창조질서를 왜곡하고 I-Thou의 관계성을 망각한 인간이다. 진정 나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화적 관계의 실존이 아니다. 무엇인가라고 묻는 인간, 질문하는 인간이 아니다. Self-center, 즉 자기중심화되어버린 인간이다. 이 인간은 rebel against God 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반역 속에 있는 인간이다. 자신의 목적으로 채워진 인간, 자기중심적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인간형이다. True Man을 자기 계획에 따라 It화 시켰다.  경건의 모양이나 종교적 치장으로 가리워져 있다 할지라고 그 본질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패역된 인간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패역된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다. 내가 대상을 It화 할 때, 결국 나 자신이 It화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참인간을 거부하고 Real Man에게 묶임으로 참인간과의 대화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참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True Man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방향성이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투사인 사람들이 많다. 전자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인간이나, 후자는 It로서의 자기이다. 하나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인간이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온 목적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나의 투사가 아니고 하나님께로 온 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부고 자신을 거기에 던지는 사람이 경건한 자, 구별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자가 경건한 자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 무엇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Thou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목적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고민해야 하지,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이 투사한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서 고민해서는 안된다. 내가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목적을 알고자 고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반역자이다.


4월 20일

인간론에 대한 정리, 신학화

I-It로 하나님을 만날 때, 현대인의 신앙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교회생활에 충실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1. 현대인의 신앙이 황폐화된 이유에 대하여 인간론적으로 평가했다. 인간의 구조를 밝히고 잘못된 구조에서 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브룬너의 견해는 높이 살만하다.


2. 타자에 대한 I-Thou의 관계는 이미 다른 학자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러나 브룬너는 이것을 I-I에 대해서까지 확대한다. 그는 자기와 관계할 수 있는 실존으로 인간론을 확대시켰다. 인간은 현재의 모습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초월의 나(초월적 자아) 사이의 관계에 인간이 실존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존이 존재와 다른 것은 자기 성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적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를 인식, 성찰할 때 실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두는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만으로 존재해서는 안된다. 실존할 수 있는 자기성찰이 인간에겐 가능하다. 이것은 나와 이웃의 관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나와 나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이 초월적 자아, True Man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 연관시킴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3. 브룬너는 참인간이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는 계시와 믿음속에 있는 인간이라고 보았다. 참인간과의 대화적 관계가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참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하여 2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


①하나님 나라의 방향성을 가진 True Man을 찾아라. 그것을 찾고자 고심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지를 보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어 사는 자, 그가 참인간이다. 어떤 True Man을 가지고 있는가? Real Man의 자기 투사는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True Man은 It화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도 대상화된다. 성서가 요청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부르심, 그것을 향한 자기성찰이 True Man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바른 사랑, 이것을 향한 목적과 책임성, 소명과 결단이 True Man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향한 방향성과 결단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 당신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방향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으며 간구해야 한다. 자기바램, 자기투사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고심하며 간구해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허한 것이 아닌데, 우리에겐 왜 공허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다. 내가 처한 현실 속에 하나님의 현실이 아닐 때가 너무 많다. 그때 하나님의 현실(절대 평화와 하나님 형상의 회복)로 바꾸어야할 책임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한다. 고심하고 기도하고 은총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b. 성서의 정언적 명령들을 해애야 한다.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알아도 못하는 게 많다. 성서에는 매우 구체적인 정언적 명령이 많다. a.와 b.는 함께 간다. 후자 없이 전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True Man은 이 세상과 구별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른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쉽지는 않으나 공허하지는 않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기독교의 한 계명이라도 실천하고자 한다면 공허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한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할 수는 있으나 공허해지지는 않는다. 전실존을 걸고 고심하고 찾는 과정, 삶이 없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다.


②삶의 자세 4가지 (상호성, 직접성, 현재성, 집중성)를 구체적으로 삶의 관계 속에서 적용하는 훈련을 하라.

사람들은 언제나 율법화를 원했다. 그것만 딱하면 되는 것....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찾는 어려운 작업을 끊임없이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그토록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향할 수 있을까? 고심하라.


3) 만남의 진리 (Truth to Encounter)

우리는 어떤 사상을 이해할 때 무엇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지를 보는 것이 좋다. 브룬너는 신학에 있어 잘못된 객관주의를 비판했다. 지적오해를 굉장히 비판했다. 신학은 굉장히 살아있는 역동적인 것인데, 이것을 지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인식적, 지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지적 오해로 인해 생동감을 잃었다. 신앙은 인격적 성격을 가졌는데, 그것을 지적 이해로 변형시킨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1)계시의 개념화

브룬너에 따르면 계시, 말씀, 신앙에 대한 지적 오해는 거의 초창기에 시작되었다. 이것들을 이해되는 어떤 것으로 보는 오해가 지적오해이다. 이것은 헬라철학적 사고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면서 생긴 것이다. 이런 영향 아래에서 기독교 신학은 진리에 대한 일반적 개념, 합리적 개념을 성서 계시 개념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성서계시개념을 일반진리개념화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기독교의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진리, 본질, 존재, 초월자라는 틀 속에 계시가 집어넣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을 당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해서 서술하여 인격적 개념이 지적 개념으로 바뀌었다.

정리하자면 살아있는 계시가 합리적, 철학적, 개념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결국 계시를 깨닫고, 진리를 안다는 것이 주객도식화가 된 것이다. 말씀(다바르)가 로고스가 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2)계시와 신앙

성서는 그렇지 않았다. 성서는 인격적 작업이지 개념화한 지적 작업이 아니다. 성서는 역사서이다. 공허한 개념서가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성서는 신의 역사를 명사적인 개념화로 나타내지 않고, ‘동사’의 운동으로 나타낸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살아있는 운동, 역사를 보여주었는데, 신학은 3위1체라든가. 그리스도의 위격이라든가 하는 존재, 본질로 사변화시켰다. 그렇다고 그것을 다 버릴 수는 없다. 그것을 버리고서는 포착이 불가능하다. 결국 계시가 개념화, 사변화되면서, 추상적이 되면서 명사화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이렇게 되면 계시는 한계있는 인간에게는 바로 접근되지 않는 초자연적 교리, 진리가 된다. 개념화된 계시, 하나님은 공허하고, 추상적이 된다. 인식의 대상으로는 주어져 있지만 금방 인식되지는 않는다. 이때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신앙은 초자연적 진리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그럴 때 신앙이 좋다라고 여기게 된다. 의문을 가져도 개념화된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결국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믿음을 요구하게 된다. 개념화는 이미 주객도식화 되었다는 것이다.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 여기게 되었다.

신앙은 무엇을 믿는 행위가 되어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교리와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구조가 되었다. 그럴 때 성서정통주의와 교리정통주의는 이 구조에서 차이가 없다. 이때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믿어야 하는 진리 앞에 세워져 있고, 이것을 신앙으로 강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3)개념화의 극복

믿음의 진리에서 어떻게 개념화를 물리칠 수 있을까? 2가지 중심개념으로 이 개념화를 극복하고 있다. :

①역사적(Historical)

진리, 계시는 인간, 피조물에게 내재적으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숨어있기에 찾아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찾아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어디선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이다. 명사가 아니고 동사 comes이다. 진리는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인간에게 오고 일어난다. 은총과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어졌다.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공허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진리는 역사 속에서 변화가능한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응답 속에서 만들어지고, 일어나는 것이다. 역사를 변화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comes하고 happens 한다. 계시는 존재하고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오고, 구체적인 이 자리에서 진리가 되어지는 것이다. 성서의 진리는 시공간안에서 행위하시며 행위룰 통해 실체가 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스파크되는 것이다. 진리는 붙들어 둘 수 있는게 아니다. 바른 응답성 속에서 진리인 것이다. 그 순간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구체적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②인격적

내가 인식하면 그만인 개념이 아니다. 어떤 사고로써 포착되어지는 개념이 아니고 계시사건은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통해 바른 만남이 일어날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이다.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고 신 자신이 만나진다. 설교, 강의를 통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시의 행위와 계시의 내용은 동일하다는 결론이 된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주시는 것이다. 계시는 사건인데, 개념적 인식을 통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전인격적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위의 ①역사적과 ②인격적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적이다.

*만남으로서의 진리 신학화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만난다. 하나님은 한번도 개념화되지 않았다. 동사의 움직임이었고, 역사적이고 인격적이었다.

구약에서 계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나타났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 호칭을 보자. 출3장 모세가 하나님께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있는 야훼라는 말은 Be 동사이다.

4월 27일

진리는 역사적,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인식 가능하다. 그런데 이 진리가 헬라문화권 속에서 개념화, 이원화되어 이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이를 강요하는 것이 신앙행위가 되어버렸다. 사실 믿음은 동사의 움직임이다.

성서에서는 하나님께 존재론적으로 접근하지 아니한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 대한 답변은 “나는 이다”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항상 응답하는 사건으로 나타났지, 속성의 개념으로 나타나신 적은 한번도 없다. 행위로써, 구체적인 만남으로만 나타나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한번도 개념화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바알과의 대결에서 우상들은 실제적인 응답을 하지 못했다. 반면 하나님은 언제나 선지자들을 통해 선조들에게 어떻게 구원하셨고, 어떻게 행하셨고, 어떻게 만나셨는지를 말씀하셨지,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이다’라는 개념화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 당신을 어떤 분입니까 질문, 즉 개념에 대한 질문을 했다.

언제나 사건으로 만나시는 하나님. 그러기에 공간도 의미가 없다. 공간도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사무엘 상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진 이스라엘은 실로로 법궤를 가져온다. 법궤가 있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하나님의 뜻이 민족과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다. 법궤마저도 이방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법궤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법궤에 하나님을 개념화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법궤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두는 것인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는 법궤를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기고 지는 것의 여부는 법궤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상징화, 개념화된 분도 아니고 그러기에 공간에 갇히는 분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을 보라.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이다. 특히 유월절이 되면 민족 전체가 성전으로 몰려든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가장 핵심이었다. 그러나 A.D. 70년 기가막히고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선민인 그들이 로마에게 지고 패망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야웨의 이름으로 나가도 지는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성전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하나 남은 성전, 그들의 성전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원래 성전은 야웨와의 특별한 만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야웨와의 만남은 사라지고 성전만 남았다. 그들은 성전만이 야웨를 만날 수 있는 장소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라졌다.

이스라엘은 격렬한 전투에도 성전을 지키려고 하였다. 자식을 잡아먹으면서까지 신전의 연기가 그치질 않았고, 제사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야웨가 함께 하는 한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으나 결국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않고 무너졌다. 여전히 성전의 연기는 타올랐으나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은 수염을 뽑고 결국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겨우 남은 900여명의 사람만이 맛사다로 가서 투항을 했는데, 이들은 다시 성전을 만들고 연기를 지폈다. 그러나 그들도 3년을 버티다 전원 자결하였다.


이들은 성전 속에 야웨가 있다고 생각한 것, 즉 야웨를 공간적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성전에 갇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우리의 모습은 아주 작은 영역에 하나님을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특수한 시간, 특수한 장소에 하나님이 개념화당하실까? 예수님은 한번도 개념화, 율법화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율법의 정신에 대하여 말했다. 우리는 바리새인보다 작은 열심을 가지고, 유치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의 사회가 이렇게 암울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했던 행위, 그리고 위의 2사건을 볼 때, 우리의 어줍잖은 교회중심적 사고와 태도는 아주 위험하다. 교회의 장보다 구원의 장은 훨씬 넓다. 이스라엘은 역사적 과오와 희생을 치룸으로써 그것을 깨달았다. 어리석게 우리는 그것을 다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III. Dietrich Bonhoeffer(1906-1945)

본회퍼의 생애는 3기로 나눌 수 있다.

1. 생애

제1기 1906~1933. 1. “성장과 신학연구의 시기”

1906. 2. 4. 출생했다. 본회퍼는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명문가 집안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쌍둥이의 이름은 Sabine(여자)이다.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본회퍼는 베를린대 내과 교수였고,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로 19세기 최대의 교회사가로 이름난 아우구스트 폰 하제의 증손녀였으며, 그의 외가는 많은 신학자를 배출한 신학자 집안이었다. 하르낙, 트롤취, 막스 베서가 가까운 지인이었다.  특히 하르낙과 트롤취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어릴 적부터 당대 신학지성인들과 교류를 가졌다.

1922. 16세에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으나 두 형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고집이 센 본회퍼는 자신이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신학교에 갔다.

1923. 베를린 대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를 만났다. 아돌프 다이스만(A. Dessmann)과 하르낙(A. Von Harnack), 칼 홀(K.Holl), 라인홀드 시베르크(R. Seeberg) 밑에서 공부를 했다. 학창시절 그는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추종스타일은 아니었고, 독립적인 사고를 하고 방향을 찾아가는 학생이었다.

1927. 졸업논문으로 “communio sanctorum” -부제: 교회의 사회성에 대한 교의적 접근-를 제출했다. 대단히 우수한 논문이어서 신학자 칼 바르트도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 예찬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21살이었다. 이게 3년 뒤 출판되었고, 이것이 성도들의 교제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되었다.

      . 독일어 사목, 교목 생활

1929. 베를린으로 돌아와 신학부에 제출할 교수 임용 논문을 준비한다.

1930. 논문을 제출하는데, 이것이 ‘행위와 존재’이다. 이것도 이후 출판되었다. 그후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1년을 보내었다. 이곳에서 그가 남긴 글, 편지가 있는데 여기에는 미국에 대하여 그의 우려가 담겨 있다. ‘미국 학생들이 신학에 있어 근본적인 고민,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그리고 여기서 체류하는 동안 할렘지역을 둘러보며 6개월 동안 흑인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1931. 바르트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바르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회퍼에 대해서는 특히 그의 일대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 가운데서는 ‘마시’가 정리한 일대기가 호평을 받는다. 그는 본회퍼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을 바르트라 했다. 그가 1925년 “communio sanctorum”를 준비할 때도 바르트의 “The word of God, The word of Man"을 읽었는데, 이것을 읽으면서 새로운 본회퍼가 되었다. 바르트를 만나기 전에 그는 자유주의적 영향아래 있었으나, 그후 바르트를 통해 해방과 같은 체험을 했다라고 고백했다. 자유주의 신학과는 결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바르트를 통해 자신의 독립적 신학을 형성할 용기와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바르트의 제자는 아니었다.

1931. 여름. 본회퍼는 본에서 바르트를 만나게 된다. 바르트가 거기서 세미나를 했는데, 본회퍼는 여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는 부모님께 편지하여 이렇게 말했다. “세미나를 통해 너무나 감명을 받았다. 그의 전체가 현재하였다. 이런 만남은 이제까지 한 적이 없다.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가?” 신학을 완전히 새롭게 형성할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바르트와의 친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물론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주로 서신교환을 했는데,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지금도 이들이 나눈 편지가 남아있다. 이들의 교제와 상호영향에 대해 논문을 쓴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본회퍼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할지라도 점차 자신의 독립된 신학의 영역을 마련해 갔다는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바르트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끝까지 둘은 관계가 좋았고, 본회퍼는 바르트를 깍듯하게 스승으로 모셨다. 바르트가 본회퍼를 몇 번 꾸짖은 적도 있는데, 본회퍼는 바르트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즉시 답신를 보낸 적도 있다.

1931. 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그는 이 운동을 옳다고 보았다. International youth secretary에 선출되었고, 여기서의 활동은 그의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하여 이후 넓은 안목으로 독일과 그 교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가장 거친 청소년 학교에서 교목을 맡았다. 여기서도 본회퍼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거기로 이사하여 2개월 정도 학생들과 대화하며 함께 살았다. 본회퍼는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관심이 많았고, 직접 교안을 만들기도 하였다.

제2기 : 1932 ~ 히틀러 정권의 등장 “신학적 응답의 시기”

1932년 International youth secretary로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청년연합회에서 ‘교회는 죽었다’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는 히틀러가 아직 정식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역사현실 속에서 교회가 가만히 있는다면 교회가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이었다. 이 연설을 계기로 라디오 방송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연설은 이후 확대되어 ‘창조와 타락’으로 출판되었다.

1933. 드디어 히틀러 정권이 제국교회를 조직한다. 히틀러 정권은 제3의 제국이라 불리웠다. 제국교회는 한 명의 지휘아래 움직이도록, 히틀러 정권아래 들어가는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히틀러는 연설을 아주 잘 했다. 그는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높이면서 정권이 교회를 도운다는 명분하에 제국교회를 하나의 기치로 재편성하면서 민족주의 교회화 했던 것이다.


<신학화 1 : 민족과 기독교의 상관관계> 독일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민족과 기독교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당시 대부분의 독일교회는 제국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유명한 목사, 신학자도 거기에 소속되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라고 했다. 당시 본회퍼는 민족적으로 본다면 반역자였다. 만약 우리나라도 일본이 전쟁을 한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기독교의 정신보다 민족을 택할 때, 이것이 애국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그릇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의 미국에서도 볼 수 있다. 기독교적 가치형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면서 기독교의 가치를 그 아래 종속시킨다. 민족적이 되기 쉽다. 히틀러의 경우처럼 민족주의가 기독교와 충돌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서투른 민족주의는 위험하다. 여기에 우리가 풀어야할 난제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민족적 가치보다 우선한다. 구체적으로 일본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보아야 한다. 물론 먼저 회개를 촉구할 수 있다. 회개한 후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할 것이다. 서툰 민족주의는 상당히 위태롭다. 우리는 민족주의나 자국의 이익이 아니라 성서적 가치에 의해 선한 연대를 해야 한다. 우리와 안 맞는 듯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1933. 한편 Neimoeller 목사를 중심으로 히틀러의 종교에 대한 정치적 행동에 반대하는 목사연맹이 결성된다. 본회퍼는 이후 여기에 동참하지만 처음부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기 베를린 방송연설을 한다. “   ”, "교회란 무엇인가?" 그는 기독인, 지도자들은 어떻게 행위하여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졌고, 교회의 정치적 책임에 대하여 고심했다. 본회퍼는 이런 말을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강요된 결단을 피하고 싶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주장이 옳다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이 말은 소명을 가지고 있고,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다면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즈음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 강의를 하였다. 구체적인 현실 역사에 대한 응답성 가운데서 기독론을 강의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강의는 중단되었다. 그래서 당시 완성도, 출판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이후 필기를 한 학생들의 노트 자료를 토대로 편집, 출판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만나는 본회퍼의 그리스도론(Christ the Center)이다. 그는 이 강의를 통해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뼈대를 놓으려고 했다. 그의 기독론은 생동감있고, 살아있다. 이 강의에서는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의 기독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①현존하는 그리스도 ②지금 나를 위한 그리스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 병사들을 위한 그리스도, 노동자를 위한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병사, 노동자,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다루었다. ③그리스도의 역사성. 역사적 그리스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역사 책임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우리의 따름이라는 특징이 나타난다.<신학화 2 : 기독론과 역사성의 문제> 이것은 단순한 이론 서적이 아니다. 역사적 결단의 상황 속에서 태어난 기독론인 것이다. 전 실존을 신학적 고뇌에 건 사람의 작품이다.


5월 4일

1933.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 독일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이시기 베를린 대학을 휴직하고, 10월 영국 런던의 독일인 교회 부목으로 취임, 목회와 설교에 전념할 목적으로 갔다. 본회퍼의 이 행동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바르트도 본회퍼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편지를 보내 비판했다. : “You are German the house of your is on fire.... ”(당신은 한명의 독일인이다. 너희 독일교회가 불타고 있다. 너는 너의 위치로 반드시 돌아오라. 다음 배편으로. 만일 곧 배를 못 탄다면 그 다음 배로는 돌아와야겠지?) 그런데 본회퍼는 바르트의 이런 편지를 받고도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영국에 18개월간 머물렀다.

1934. 제국교회에 맞서서 결성되었던 목사연맹이 고백교회로 발전한다. 사람들은 흔히 고백교회를 본회퍼가 만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오해이다. 고백교회는 본회퍼가 영국에 있을 때 이미 만들어졌다. 고백교회는 정식 발족을 하고 바르멘신학선언을 발표하였다. 바르트가 이 신학선언의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본회퍼는 그의 생애의 가장 안전기를 보낸다. 그렇지만 영국에서도 그는 영국의 독일 목사들과 규합해 히틀러에게 대항하고자 했고, 망명 온 목사들의 뒤를 봐주었다. 영국에서의 그의 생활은 견문을 넓히게 했고 이후 독일 밖의 연결고리가 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지게 했다.


이즈음 신학화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학화 3 : 간디화의 대화> 본회퍼는 간디와 서신교환을 많이 했다. 본회퍼는 간디를 “우리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칭했다.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를 묻는 것이다. 독일의 다수 신학자들은 적그리스도와 같은 히틀러에게 동조, 신학적 정당화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했다.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간디는 힌두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평화, 박애 정신은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교회론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선교와 관련하여 가시적 교회가 교회인지 바람직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바로서는 곳이 교회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가시적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일어날 수 있다. 간디도 가시적 교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았기에 교회에 속하고 구원의 반열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임재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이 서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방주적 개념으로 구원의 개념을 가시적 교회 내에 제한할 수 없다. 당시 제국교회 편에 섰던 신학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의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신앙고백의 질과 내용을 점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본회퍼의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그리스도를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전 실존을 걸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이다. 구원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냐? 바른 그리스도의 정신 속에 거하게 하는 것이냐? 선교의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35. 4. ‘안정된 목회만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성찰을 하던 차, 고백교회의 부름을 받고 수난의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일로 돌아온다. 독일 북쪽 발트해 부근 징스트(Zingst)에서 23명의 목사후보생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가 직책은 목사연수소, 즉 일종의 무인가 신학교 연수소 소장에 해당된다. 이것은 불법이었다. 그후 이 연수소는 징스트에서 빙켄발데(Finkenwade)로 이동을 한다. 여기서 본회퍼는 강의도 하고, ‘형제의 집’이라는 연수소에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제자의 도(The Lost of Discipleship )’를 강조했다. 그들과 정신적, 물질적 소유를 나누고, 기도, 명상, 노동, 청소를 함께 하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의 길’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35년 저술하여 37년 출판되었다.

연도는 중요하지 않으나 빙켄발데에서 중요한 일이 있었다. 연수소에서는 인근 주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여기서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Maria Von Wedemeyer)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이때는 어린 소녀였다. 이후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1937. 9. 연수소가 게슈타포의 명령으로 폐쇄된다. 본회퍼는 강연도 금지당하고, 저술도 금지당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해산당했다. 본회퍼는 갈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학생들의 집을 다니며 전전긍긍했다. 이 해말 대부분의 학생들은 체포, 강금되었고, 군대로 끌려가 한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1938. 쌍둥이 여동생 사빈의 집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연수생활을 회고하면서 4주만에 ‘신도의 공동생활’을 집필하였고, 39년 출판하였다. 이후 사빈의 가족이 추방당하였다.

1939. 6. 갈곳없는 본회퍼를 미국의 니버(R. Nebuer)가 초청하였고, 본회퍼는 유니온 신학교로 가게 된다. 고백교회에서도 그가 미국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그는 고립된 고백교회에 미국의 관심을 갇게 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 7월 깊이 고민하다 편지 1장을 남기고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일기를 썼다. “조국의 어려운 시기에 함께 하지 못하면 전후 재건시 독일의 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 한 달만에 전운이 감도는 독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시기는 신학적으로 어떻게 응답하느냐의 시기였다. (응답 모색의 시기)


제3기 : 1939~ 44 : 사랑과 처형

돌아온 시기는 2차대전의 발발시기였다.

1939. 9.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40. 3. 강연, 저술이 금지된 이후 본회퍼의 고심은 윤리에 문제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와 틈틈이 윤리에 대하여 저술하기 시작한다. 몇 년간 뼈대를 잡았다.

1941-42.  반나치지하운동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본회퍼의 자형 도나리(Dohneny)는 국방정보부 장관 가나리스(Ganaris)의 참모였다. 이 도나리가 본회퍼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여기에 가나리스도 호의를 가졌다. 또한 밀러(J. Muller)라는 신부도 함께 하여 이 운동이 교황청과 연계되는데 도움을 준다. 본회퍼는 교황청을 통해 히틀러를 암살하게 되면 독일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휴전을 해 줄 것을 타진하고자 했다. 영국 국방성에서 직접 대면을 요청받고 본회퍼는 만나 의사타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시기 한편 숙년의 자태를 갖춘 마리아와 본회퍼는 재회하게 되고 교제를 시작한다.

1943. 1. 13. 본회퍼는 마리아와 약혼을 한다. 당시 마리아는 18세였다. 이 시기 마리아의 행복한 편지글이 남아있다.

1943. 3. 본회퍼는 2차례 히틀러 암살시도를 하나 실패한다. 바로 측근에 있던 스미트 부바가 배신하여 게슈타포에게 밀고했던 것이다.

1943. 4. 암살을 시도했던 핵심 전원이 체포당한다. 본회퍼는 마리아와 결혼도 못하고 감옥에 갇힌다. 마리아는 규칙적으로 감옥을 방문했고, 그것을 본회퍼는 들떠 기다렸다. 감옥에서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했다. 내용은 마리아를 만나기 이전, 21살 신학도일 때 사랑을 느꼈으나 꽃피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첫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1년 반정도 면회와 편지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1944. 10월 이전까지는 일반 감옥, 테겔 감옥에 있다가 게슈타포의 수용소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소식이 끊기게 되었다.

1945. 2. 강제수용소로 옮겨진다. 마리아는 필사적으로 수소문한다. 비밀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을 당했기에 마리아와 가족은 본회퍼의 처형을 알지 못하고, 계속 수소문을 한 끝에 여름에 가서야 알게 된다. 크게 오열했다. 본회퍼의 처형소식은 영국의 라디오 방송으로 먼저 알려졌다.

마지막 감옥에서의 2년간은 중요한 시기였다. 긴 시간을 테겔감옥소에 있었다. 이 곳에서 많은 편지와 구상, 저술을 했다. 편지를 모은 것은 ‘옥중서간’이고, ‘저항과 복종’이다. 여기에 못다한 윤리와 비종교화라는 신학적 테제가 꽃피운다. 베트게가 엮었다. 어떻게 나치 감옥에서 그의 편지가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대부분은 베트게를 통해 밖으로 전해졌다. 간수 중에 의로운 노블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통해 베트게에게 본회퍼의 편지가 전해졌다. 베트게는 본회퍼라는 인물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자료를 철저히 수집했던 것이었다.

그의 위대함은 감옥생활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경건한 생활은 감옥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타났고, 간수와 죄수도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삶의 경건을 보여주었다. 죄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주었다. 본회퍼의 연구가 넬슨은 ‘본회퍼는 진정한 목사였다.’라고 평했다.

1945. 4. 9. 처형되었다. 본회퍼의 죽음을 참관한 의사는 그의 죽음을 특이하게 보고 기록을 남겼다. ‘죄수복을 벗기자 기도했다. 처형의 현장에서 기도하고, 태연하게, 용감하게 처형장으로 올라갔다.

*신학적 정리

참다운 신앙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책임적으로 표출되고 드러나야 하는가를 고심한 본회퍼, 그 고민의 깊이가 본회퍼를 만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신학자는 삶, 역사 앞에서 신앙이 무언지를 신학화하지 못했다. 신앙이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지 못할 때,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역사속에서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본회퍼는 고민하고, 거기에 응답했다. 우리 시대의 신학적 책임, 역할은 무엇인가? 본회퍼는 이 신학적 고민을 끝내 가지고 있었다. 신학적 고민의 깊이와 신학의 크기는 확실히 비례한다. 고민없이 깊어지지는 않는다. 그의 고민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당시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회퍼가 있어서 기독교는 살아있다라고 말한다. 20세기의 순교자 본회퍼, ‘나는 나의 이 어두운 역사 속에 신학적 실존으로 이렇게 응답했다.’라고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시대에 우리가, 내가 감당해야할 역사 책임적 과제는 무엇일까?


2. 사상

1) 성숙된 세계, 세속화, 비종교화

세속화에 대한 본회퍼적인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이것 없이 그냥 본회퍼의 사상에 접근하면 오해하기가 쉽다. 세속화란 3가지 개념 : Secularization, Secular, Secularism 이 있다. 이 가운데서 본회퍼가 사용한 것은 Secularization이다.

Secular는 어떤 특별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오는 세대에 반해서 현재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세상 속에서 성직생활을 하는 이를 지칭할 때도 이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후로는 시민활동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교회의 지배를 벗어난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초월적 힘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지배할 수 있는 영역, 일반 사회영역이 Secular 영역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종교와 Secular은 대립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종교가 아닌 일반학문의 영역이 Secular영역이었다. 성과 속에서 속에 해당하는 영역인 것이다. 지금은 성의 영역은 현저히 줄어들고 대부분 이 속, 즉 Secular영역이 되었다. 이 개념으로 본회퍼의 세속화를 이야기하게 되면, 그 의미를 성을 포기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상당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본회퍼의 세속화는 이 개념이 아니었다.

Secularism은 학자들에게 통용되는 용어이다. 19C 지나면서 생겨났다. 홀리 욕이라는 사람에 의해 사용된 전문용어였다. 이것은 신에 대한 믿음 없이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구연할 수 있다는 윤리, 철학을 의미했다. 신이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 영국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이 세속주의의 사회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는 순수 인도주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그래서 선행도 많이 한다. 이들은 종교교육을 반대하고, 아주 반기독교 적이다. Ngo 단체 가운데도 여기에 속한 것이 많다. 이 사회는 아주 헌신적이고, 호소력도 있고, 자원봉사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리기에 본회퍼의 세속화는 Secular와 Secularism 과 구별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오늘의 기독교인이 해야하는 진지한 질문은 ‘과연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이라 했다. 그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질문은 오래전 니체에 의해 던져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이 질문에 대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답변했다. ‘역사 속에서 신이 살아있지 못하다면 교회는 신의 기념관이나 무덤에 불과하지 않는가?’ 니체는 서구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인간은 극복되어져야할 존재이고, 그러면 초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라고 보았다. 니체는 이미 신이 죽은 현실, 세속사회를 직시했었다. 신이 더 이상 들어올 공간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찾아내고 보여주지 못한다면 니체의 도전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의 예언과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속사회에서 맞닥뜨릴 위기를 직시한 것이다. 니체의 이 질문에 4-50년동안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본회퍼에게서 답변은 시도된다.

(1) 세상이해 : 현대 세계의 이중성

‘신은 죽었다.’ 이것은 상징적 표현이다. 여기서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꼭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아닌 모든 초월적 실체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초월적 존재가 세속사회를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독교인들마저도 정말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라고 믿을까?  믿음의 상실이 일어난 것이다. 세속사회의 모든 일은 그 내적근거와 이유에 의해 근거되어진다. 초월자는 무능력, 무생명적인 존재로, 명목상으로만 전능할 뿐이다. 신은 명목상으로는 존재하나 세속사회의 인간에게 실지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니체는 그것을 지적했던 것이다. 예배는 그에 대한 기념예배, 추도예배일 뿐이다. 이 세속사회에는 더 이상 신의 자리가 없다. 본회퍼는 이러한 현대사회, 세속사회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의 세속사회에 대한 이해는 니체의 이해와 연결된다.


그는 현대사회를 단순적 성격이 아닌 이중적 성격을 가진 사회 로 보았다.

먼저 성숙성 을 가진 사회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신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 신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왔다. 외부로부터 오는 힘을 포기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러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라는 것이 본회퍼의 생각이다. 주일학교 때, 우리는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보지만 이것은 통과의례적이고 자라면서는 그러한 생각은 퇴색된다. 인간은 자라면서 하나님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바뀐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종교적 규범에 의한 타율적 형식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결정과 의미를 역사 내에서 찾아내는 자율적 세계관이 온 것이다. 종교적 규범에 의해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는 어린이의 세계가 아니고 성숙한 세계5)에 들어오게 되었다. 인간의 계획에 의해 현실 세계가 돌아간다고 믿는 세계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성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왔다. 성숙된 세계는 책임성을 요청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자연, 세계를 잘 보전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책임 하에 들어왔다. 이것이 그의 현대 이해이다. 그래서 이제 이 세상은 과거의 타율적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라고 그는 결론짓는다.

그의 이러한 세상이해는 중요하다. 여기에 맞는 대안, 처방이 나온다. 과연 돌아갈 수 없는가? 아니면 프로메데우스적인 시도를 해야 하는가? 본회퍼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라고 했다. 만약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신학, 목회, 삶의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본회퍼의 생각에 동의를 하면서도, 그의 생각이 옳다라고 하면서도 방향을 바꾸지 아니하고 오던 길을 계속 간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동시에 무신성(허무성)이 나타난다. 자율성을 가진 현대세계 안에는 타율적 존재인 신이 자리할 곳이 없다. 추수감사절의 기도도 농사가 기계화된 이후로는 덜 감동적이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추수의 결과를 인간이 많이 컨트롤하게 됨에 따라 감동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이런 말을 했다. ‘구식 배의 어부가 모터달린 배의 어부보다 신에게 더 잘 의존한다.’인간이 통제하는 범위가 커지는 만큼 신부재의 현실을 보게된다는 것이다. 자율성을 따라사는 사람에게는 무신성이 집단적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무신론이 대중적으로 오고, 신부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되었다. 무신성 자체가 세속화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허부하게 되었다. 신부재는 무신성으로 무신성은 무관심으로 결국 허무에 노출되는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5월 18일

*신학화

문제제기에 가까운 신학화를 해보자. 지금보다 60년전 본회퍼가 이런 세상이해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의 이러한 진단은 지금 우리시대에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본회퍼는 그 당시에 이미 이렇게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현실을 2개의 현실로 보는 경향이 많다. 하나는 세속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교라는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2가지의 현실세계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회퍼는 하나의 현실을 보았다. ‘지적인 정직성으로 볼 때, 종교세계가 따로 있고, 세속세계가 따로 있는 것인가? 오히려 하나가 아닌가’본회퍼의 생각이다. 본회퍼의 사고와 유사한 형태가 해방신학에서도 나타난다. 서구는 구속사와 세속사를 나누어 생각했는데, 해방신학은 이러한 두 역사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 역사를 이처럼 두 개로 나누게 되면 기독교는 자연히 구속사에 무게를 두게 되고, 세속사는 등한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대립되는 실체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만약 두 세계가 없고, 두 역사가 없다면? 해방신학에서는 역사를 하나로 보고 있다. 두 역사가 평행선을 그리며 따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역사는 만나고 함께 간다고 이해했다. 두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며, 세계도 하나의 세계이다. 다만 관점의 차이일 뿐이고, 해석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의 초점, 관점이 무엇인가? 어떤 세계이해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역사관, 종말관을 가지느냐에 다라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지 서로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2)종교와 계시6)

그의 종교와 계시의 정의를 보자. 종교는 계시의 외적 표현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계시는 종교를 통해 표현된다. 종교는 계시의 옷과 같은 것이다. 종교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기독교의 조건적이고 변화하는 개념이 된다. 담고 있는 것은 동일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종교성 안에 담겨있는 계시여야 한다. 그리고 확고한 계시에 대한 인식 위에 우리 시대에 적절한 종교를 찾아야 한다.

모든 종교는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종교성이라는 것은 서로 유사하다. 외적 표현에서 비슷한 형태가 많으므로 우리는 종교가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종교성에는 예배형태, 묵상 등의 외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인간이 가지는 외적 형태는 모두 종교성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종교성은 아주 유사한게 많다. 그래서 비교종교론자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종교는 모두 비슷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성을 두고 이해한 것이기에 그들의 견해를 따를 수 없다. 계시라는 독특성이 기독교를 타종교와 구별한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계시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의 능력과 생명을 상실하고 기독교의 참다운 측면을 죽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본질적 측면을 잃었다. 그는 종교성에 치중하는 교회를 이렇게 비판하였다. 계시는 없고, 종교, 외적 형태만 있는 것이다. 어떤 경건성에 대한 강조도 기독교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라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는 종교적 체험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호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종교비판은 우리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종교성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종교성에 대한 강조로 인해 복음, 계시 자체가 약화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종교비판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바르트와 괘를 같이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바르트는 종교를 신학적 입각점에서 비판했고, 본회퍼는 실천적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비판했다는 것이다. 인식은 비슷했으나 입각적이 달랐기에 결과도 달랐다. 바르트는 신학안에서 했기에 인간의 잘못된 경건성을 비판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잘못된 경건성은 우상숭배가 된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현실 역사 속에서 종교성에 우선을 두는 교회가 유지될 경우 현실 속에서 결국은 기독교가 비기독교화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도달할 것이라 염려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동질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본회퍼는 잘못된 경건성은 우상숭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로 나타난다라고 보았다. 그래서 바르트와 본회퍼는 대처방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바르트는 신학안에서 대처했으나 본회퍼는 실제적으로 역사 안에서 대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세속화된 지식과 사고체계 속에서 어떻게 초월적인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양자는 조화가 가능할까? 성과 속의 이라는 두 세계 속에서 속의 영역이 자율성을 획득함으로 커져있는 현실, 이 속에서 하나님을 논할 수 있을까? 초월적 하나님을 성숙한 세계 속에서 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

①이해되지 않는 gap을 메우시는 하나님으로 논할 수 있다. 하나님은 gap을 메우시는 존재로만 다가온다. 이성적,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 속에서는 하나님을 논할 수 없다. 아직도 납득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영역에서만 신은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다. 예로 진화론 가운데서 아직 파악되지 않는 것만을 하나님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납득되지 않는 신비, 그 gap 속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밖에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gap도 점차 메워져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결국 과학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담보해 내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밖에는 신을 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본회퍼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②삶의 취약점 속에서 하나님을 논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취약해지는 순간, 신의 존재를 위한 조금의 여지가 생긴다. 좋은 때는 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러나 좌절, 고치지 못하는 병, 죽음, 심리적 불안과 같은 인간의 취약한 상황이 생길 때, 그때 신을 논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여기서 인간이란 자기의 기준, 가치, 능력에 따라, 자율적 계획에 따라 살아가다가, 거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신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구조가 현대 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1차적 기준에 의해 살아간다. 보통사람의 일반적 삶, 평탄한 삶에는 신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신학화

부흥사들 가운데는 이러한 인간의 취약점, 죄의식을 교묘하게 건드려서 헌금을 모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본회퍼가 지적한 이런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왜 이런 식으로 밖에는 하나님을 논할 수 없느냐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극복이 아니라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 환란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헌금을 많이 우려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종교성에 초점을 두는 프로그램에 의존하거나 삶의 취약점을 겨냥한 설교에 의존하는 한국교회의 현실 안타깝기 짝이 없다.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3)비종교화 : 성과 속의 해체

이 세계는 한편으로는 성숙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신성 속에서 허무에 던져져 잇다. 그래서 신은 gap이나 삶의 취약점에서만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학자로서 나는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가? 본회퍼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우리의 고민도 이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주인이 아니신가? 그는 종교영역만이 아니라 세속영역에서도 여전히 주인이시다. 그러기에 전체의 하나님이 되게 하려면 종교적 영역을 크게 하여 세속영역을 포함하게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세속영역으로 나와야 한다. 2갈래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적 종교관, 타율적 세계관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세속화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가 했던 시도는 성과 속의 이중성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두 영역의 해체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종교적 세계와 비종교적 세계의 구분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중성을 해체함으로 전체 역사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다시 세우고자 의도한 것이다. 그는 이것의 타당성 여부에 매우 고심했는데, 2가지 측면에서 타당하다라고 보았다. :

①신앙이라는 것은 이 세상적 측면을 가진다. 그 논거는 기독론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시고 이 세상 속에서 제자들과 만나셨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만나는 예수가 예수인 것이다. 그는 예수에 대한 고백은 이 세상 속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예수에 대한 고백이 역사적으로, 현재적으로 일어났다.

②이 세상 속에서도 거룩의 측면이 있다. 노동이나 헌신이라는 것에도 하나님의 거룩성, 위임의 측면이 있다라고 보았다.

이러한 본회퍼의 시도에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상당히 창조적이다.

비종교화의 이유는 무엇인가? 본회퍼의 윤리는 신학적 틀 안에서 이해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본회퍼를 세속화 신학, 기독교 신죽음의 신학의 원조로 잡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본회퍼는 그들과 목적과 의도에서 달랐다. 본회퍼는 세속주의가 아니었다. 본회퍼는 기독교가 세속화되어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전체 역사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가 세속화를 용인하였다거나 세속화를 가속시켰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비종교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종교적 영역과 비종교적 영역의 기준이 계시가 아니라 종교성이더라는 것을 발견했다. 외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두 세계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성과 속을 나눈 기준이 종교성이므로 종교성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잘못된 종교성으로 인하여 계시의 본질인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인 아닌 이상한 형태로 전도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성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본회퍼는 그것이 비종교화라고 보았다. 복음, 계시를 세속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세속화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종교성을 비종교화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계시의 본질, 하나님이 전체 역사의 주인되심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비종교화를 함으로써 하나의 현실만 남게 되는데, 이 현실, 삶은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이 현실, 삶을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 전체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전체로써의 나와 만나신다. 이 현실은 하나님의 현실일 뿐이다. 한 시간의 예배에 만족할 수 없다. 오직 하나의 현실만 있을 뿐이다.

비종교화는 종교의 옷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그는 선포한다. 종교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성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택했다. 그것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었다. 이것이 성숙된 세계에서 신앙의 삶인 것이다. 성숙된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하는 삶은 신없이 신앞에 살아가는 삶이다. 신없이 신앞에가 비종교화의 의미이다. 신없이는 종교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앞에 있다. 종교성 속에서의 신은 없으나 삶 속에서 신앞에 서 있는 것이다. 성숙된 세계 속에서 신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은 신앞에서 사는 것이다.

2)그리스도 중심적 윤리 - 신없이 신앞에

방향성이 나왔기 때문에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루어야 한다. 그의 윤리는 이러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신없이 신앞에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제 다루어보자. 이 부분이 본회퍼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성과 속의 이원화를 해체했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신없이 신앞에로 나타났다. 제자의 길과 옥중서간, 기독교 윤리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윤리에 대한 체계적 저술을 쓰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것은 40-43년에 쓴 단편적 저술이다. ‘기독교윤리’는 순서자체를 베트게가 다시 편집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윤리’책 중에서는 서로다른 순서를 가진 책이 있다.

(1)그리스도의 현실

본회퍼의 행위, 윤리의 출발점은 항상 구체적 현실이었다. 비현실적인 추상적인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보았다. 그에게 윤리의 과제는 추상적 원리나 규범을 찾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출발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무엇인가? 그에게 현실은 지금 우리가 발딛고 사는 주어진 현실이 아니었다. 그에게 현실은 그리스도의 현실이었다. 이것이 그의 윤리의 출발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윤리는 선을 추구하고, 구체적 행동규범, 원리를 찾는 작업이다. 본회퍼도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옳지 않다라고 여겼다. 구체적 현실이 없는 규범, 원리는 모호해진다라고 보았다. 자연적 인간을 말하고, 그가 규범이나 윤리를 말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자연적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선의 목표를 찾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발점은 이 세상의 현실이나 인간의 현실이 아니다. 이것은 결국 일반적 윤리에 대한 3가지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즉 ①경험주의적 윤리관을 시도하지 않겠다. 이 윤리관에서는 다수가 일부다처를 한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받아들이겠는 결론이 나온다. 주어진 현실을 중요한 윤리적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②측정가능한 실증주의적 윤리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윤리관에서 나왔다. ③상황윤리를 거부하겠다. 본회퍼를 상황윤리를 대변하는 자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상황윤리는 주어진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본회퍼와 맞지 않다.


5월 25일

본회퍼는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윤리관을 거부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을 윤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 세상은 두 왕국이 아니고 하나의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궁극적 현실성을 가질 수 있는 실재이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바른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현실은 피상적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언젠가 극복되어질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가리워져 있으나 그리스도의 현실이 실재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여러 현실에 대해 투쟁적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실체화된 현실만이 있다. 윤리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현실을 실현해 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윤리란 어떤 가치 규범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현실에 내가 참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윤리의 목적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 도덕적 인간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조화롭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피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적 현실을 실현하는 것이 윤리의 목적이다. 본회퍼는 일반적인 선이란 없다고 단정했다. 굳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현실에 참여의 여부가 선의 기준일 것이다.

신학화 2가지

본회퍼의 윤리에는 다른 윤리학자와 구별되는 2가지 특징이 있다. :

① 그는 그리스도의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보았기에 어떠한 다른 현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자체로 매우 강한 저항, 변화를 요청한다. 그리스도의 현실에 반하는 현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현실로의 변혁을 요청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결단하게 한 행위의 동기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보아도 그를 상황윤리자라 할 수 없다.

② 그의 윤리는 하나의 주제나 갈래가 아니라 그의 전체 신학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윤리의 방향성은 신학의 총체적 결론처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윤리를 하나의 규정처럼 다루지 않았다. 그는 윤리 문제에 대하여 사례별로 다루지 않았다. 본회퍼는 전체 신학의 틀 안에서 윤리의 케이스를 다루었다.

(2)형성으로서의 윤리 (Ethic as formation)

본회퍼는 형성으로서의 윤리를 제시했다.

①단순성과 지혜 그는 윤리의 내용을 포착하고 들어가는데 있어서 2가지 개념을 제시했다. “단순성과 지혜”이다. Simplicity & Wisdom. 단순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지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즉 reality를 볼 수 있는 눈을 지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깊이와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이 둘, 단순성과 지혜를 종합하면 다음이 된다. ‘단순과 지혜는 자유 안에서 하나님과 역사의 실체를 모두 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본회퍼는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았다. 단순과 지혜로만 자유 속에 들어간다. 잘못된 세상의 가치,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단순하게 볼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인은 자신도 모르게 관념, 습관, 타성에 젖어 살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단순함과 지혜로 가능하다.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하다. 본질적인 문제에서만 철저하다. 단순과 지혜안에서 자유를 얻고 동시에 하나님과 역사의 실체를 바르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이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이 역사는 거룩한 기적이다. 구속사도 세속사도 아닌 하나님 없는 세상도 없고, 세상 없는 하나님도 없다. 이 역사, 거룩한 기적, 한 분 하나님이 이 세상과 만나고 세상은 하나님과 만나며 함께 하나의 실체가 드러났다. 무엇을 통해서 드러났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거룩한 기적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오직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세상은 신비, 기적으로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본회퍼는 예수의 모습에서 윤리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②Formation 

그러면 단순과 지혜로 역사를 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가 살았던 form, 그 독특한 form, 하나님과 역사가 만난 그 독특한 form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form을 formation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form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form을 이 세상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 기독교 윤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는 선행기준을 만들고 그것의 성취를 위한 노력이 아니다. 이런 식이 되면 윤리가 아닌 율법이 되고 만다. 율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을 상실하고 규정만 남게 된 것이 문제이다. 율법의 원정신을 찾는 작업을 해야 한다. 원정신을 두고 율법만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규범적 윤리가 시도한 시행착오였다.

본회퍼는 기독교윤리가 윤리적 규범마련이 아닌 그리스도의 form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계시적 현실에 복종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라고 했다. 그러기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윤리적 삶이 교회 안에서만 나타난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윤리적 삶은 내면 안에 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실현도 아니다. 윤리적 삶은 우리의 삶, 역사 안에서 전실존을 건 복종을 요구한다. 이것이 formation의 의미이다. 예수 안에는 종교적 영역이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 예수에게는 하나의 영역만이 있다. 합쳐진 하나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현실이고 참현실이다. 종교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의 구별은 없다. 전실존이라는 하나의 실존만 있을 뿐이다.

이제 성의 영을 따로 구별할 필요는 없다. 전 영역, 하나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나의 전 삶이 그리스도의 form을 향하는가? 아니면 그것에 저항하는가만 있다. 전실존이 신앞에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만 있다. 신이 따로있는 공간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전실존이 신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③그리스도의 form으로 formation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회퍼는 일단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경건주의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적이거나, 수도원적인 삶, 식사를 줄이고 말을 줄이고 하는 식이 아니다. 개인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현해 보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위험한데, 왜냐하면 영적 교만 속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formation 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예수의 form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모방이나 반복이 아니다. 영웅주의, 초인주의도 아니다. 신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form으로 formation 한다는 것은 참인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의 최종적 목표는 보편적인 원리, 율법을 찾는 것이 아니고 참인간이 되는데 있다.

본회퍼가 요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유일한 현실, 그리스도의 form을 따르자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어렵다. 컴퓨터를 format 하듯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현실로 formation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성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form속으로 들어가느냐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내가 formation되느냐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과제는 그리스도의 form으로 formation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한 부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와 똑같아지는 것이다.

(3)궁극적인 것과 길예비

그리스도의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완전히 현재화된 현실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 들어오지 못한, 극복되어야할 현실 속에 우리는 발 딛고 있다. 완전히 그리스도의 현실 속에 들어온 상태를 그는 궁극적인 상태라 불렀다. 그리고 의인화되지 못한 상태, 아직 궁극적이 되지 못한 상태를 궁극이전의 것이라 불렀다. 우리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에 있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현실이 있기에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이 혼재해 있다고 하겠다. 지향해야할 최종 방향은 궁극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이전의 것은 파괴해야 하는가? 궁극이전의 것과의 관계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자연적, 세상적, 육체적인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근원적인 그리스도의 현실과 아직 그렇지 못한 이 현실 상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먼저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관계성을 정리하는 데 2가지 길이 있다라고 보았다. :

①궁극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궁극이전의 것은 무시하는 것이다. 이때 궁극 이전의 것은 무의미한 것, 죄, 예수그리스도와 대립되는 것, 거부해야 하는 심판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궁극이전의 것을 궁극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적인 것은 궁극이전의 것을 파괴시키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 길을 따르지 않았다. 만약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을 사랑으로 관계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세상은 무시, 파괴되어야할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을 따르면 매우 가혹한 율법성이 드러나게 된다. 

②다른 하나의 길은 타협의 길이다. 이는 궁극이전의 것, 현재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말은 아지 오지 않았다. 궁극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여전히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궁극이전은 여전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궁극이전은 궁극으로부터 위협받지 아니한다. 궁극은 언젠가 임할 하나의 상징으로만 존재한다. 현재 현실적으로는 궁극이전만으로도 세상은 유지된다.

본회퍼는 2길 모두 문제가 있다라고 보았다. 본회퍼는 ①의 길을 극단주의의 길이라 불렀고, ②을 타협주의의 길이라 불렀다. 두 길은 결국에 서로 배격하는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두 길은 완전히 다른 길이다. 본회퍼는 이렇게 표현했다. : ‘극단주의는 종말을 절대화했고, 타협주의는 보전을 절대화했다. 극단주의는 시간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영원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인내를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결단을 미워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느 길을 갔을까? 예수님은 둘 다 택하지 않았다. 이 둘은 어느 것도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길, 궁극과 궁극이전의 것이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둘의 만남과 화해가 이루어졌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둘은 하나가 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이다. 궁극이지만 궁극이전에 들어오셨다. 죄가 없으나 죄인으로 죽었다. 궁극이지만 궁극이전에 서 있었다. 그는 부활의 주가 되었지만 십자가를 지신 채 여전히 세상 속에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form은 궁극과 궁극이전이 만나는 현실이다. 극단주의와 타협주의를 넘어서는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둘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자이다. 궁극인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이전의 것을 파괴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안에서 둘은 만났다. 궁극은 궁극이전을 배제하지 아니한다. 궁극이 마지막 말이지만, 궁극이전이 궁극 앞에서 무의미하지 않다. 궁극이전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궁극을 향해 나아가는 관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form을 따른다는 것은 궁극이전이 궁극을 따를 수 있도록, 나아갈 수 있도록 길예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라. 믿었다.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 실존을 그리스도께 바쳐라. 바쳤다.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실천하라. 비록 실천하기가 힘들지만, 정말이지 목숨을 걸고 실천했다고 가정하자. 나의 이 실천이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가? 질적차이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의 완성과 연결되는가?

궁극적인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천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실천은 길예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결단이다. 우리가 길예비를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오실 것이다. 그러나 길예비는 신앙인의 책임성이요 응답성이다.

궁극 이전은 궁극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윤리 p117) 궁극이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책임감을 일깨워준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소외된 자에게 사귐을,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는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러한 것들이 은총의 도래를 위한 길예비이다. 본회퍼에게 길예비는 히틀러에 대한 대항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자연인의 윤리는 일반인이 말하는 선의 개념에 따라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그것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판단기준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일반인이 빵을 주는 것과 기독인이 빵을 주는 것은 다르다. How? 일반인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으나 기독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궁극이 임하기 위한 길예비로 본다. 궁극 이전 자체를 위해서, 역사 내적 이유에서 빵을 준다. 그러나 기독인은 궁극이전이 궁극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 궁극 도래를 위한 길예비로 하는 것이다.


6월 1일

IV. 루돌프 불트만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는 성서신학자이다. 그러나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음으로 조직신학자의 반열에도 속한다. 그래서 그는 다양하게 분류된다. 성서학, 조직신학, 철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대상이다. 양식사학 연구로도 유명하다.

1884년 출생했다. 바르트보다 2살 많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목사이다. 초, 중이 연결된 학교를 다녔는데, 헬라어를 좋아하고 능통해서 시를 쓸 정도였다. 칼 야스퍼스와 조우하기도 했다. 그후 티빙겐, 마부르그에서 공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했다. 그에게서 독특한 것은 마부르그를 떠난 적이 없고, 가르치는 일과 글쓰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많다. 보른캄, 푹스, 에벨링 등. 열렬히 추앙하는 제자들이 아주 많았다. 거의 세계적인 신학자들이었다. 학파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불트만에게는 학파가 있었다. 바르트에게는 추앙하는 사람들이 바르트 매니아, 바르시안이 있다. 그러나 불트만 학파는 워낙 강력해서 불트만의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되었다. 몸은 외소했고, 우울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고, 군대는 면제받았다. 성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야스퍼스는 불트만에 대하여 집요하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성격을 가졌다라고 평가하는 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아주 경청을 잘하는 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생긴 외모 때문인지 여성에 관한 구설수에 오르지도 않았다.


‘선포와 신화’라는 논쟁이 발생했다. 바르트, 브룬너의 논쟁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불트만이 비신화하를 발표하자 논쟁이 발발한 것이다. 야스퍼스도 논쟁에 참여할 정도였다. 바르트도 여기에 가담했다. ‘불트만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둘 모두 쟁쟁했다. 논쟁과 답변이 1, 2, 3편 계속 나왔다.


2번째 큰 공헌과 방향성은 루터연구에 관한 것이다. . 불트만은 루터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한 사람이었다. 불트만은 제자들에게 루터연구를 많이 시켰다. 개혁신학의 전통과 비신화화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루터 연구가 신학의 또 하나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복음도 아주 강조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출판되었을 때, 불트만이 서평을 썼다. 바르트도 그의 서평을 기쁘게 받았다. 젊은 시절 둘은 한 그룹이었다. 모두 종교개혁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개혁 측에서 추앙을 받은 반면 불트만은 욕을 많이 먹었다. 루터교에서는 불트만 루터 연구하는 것 자체도 싫어했다.


3번째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중요한 방법론을 견지하는 입장을 가졌다. 역사비평의 결정판이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나타나는데, 거기서 양식사 비평이 나온다.

1984년 불트만 100주년 기념이 마부르그에서 열렸는데, 이때 그가 거닐던 길에 불트만 도로라는 명칭을 붙였다.

출처 : 실버 말씀운동
글쓴이 : 萬事恩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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